올림피안 과거 외전

아직,
바다였을 때

테미스 최정예 각성자 팀, 올림피안. 인류의 방패.
그런데 왜 아침부터 냉장고 앞에서 싸우고 있는 거냐.

단편 01냉장고에 이름 쓰지 마

올림피안 숙소 냉장고엔 규칙이 하나 있었다.

남의 음식에 손대지 말 것.

3년째, 하루도 안 지켜졌다.

베인"누가. 내. 푸딩. 먹었어."

서도혁이 냉장고 문을 벌컥 열어젖힌 채 돌아섰다. 손에 든 건 텅 빈 푸딩 컵. 뚜껑엔 매직으로 큼지막하게 '서도혁' 석 자.

주방에 있던 셋이 동시에 딴청을 피웠다. 호세는 시리얼을 씹었고, 케일럽은 휴대폰을 봤고, 반우진은 미소를 지었다.

베인"…케일럽."

트러블"왜 나야."

베인"이름 써 붙인 걸 먹는 미친놈이 너 말고 또 있냐?"

케일럽이 당당하게 소파에 다리를 올렸다.

트러블"그니까 이름을 왜 써 붙여. 도발이잖아 그건. 냉장고에 '서도혁' 붙어 있으면 먹으라는 소리지."

베인"뭔 개소리야."

트러블"먹어달라는 거지."

베인"이 새끼가—"

서도혁의 손끝에 옅게 물기가 어렸다. 능력 발동 직전의 신호. 케일럽도 지지 않고 소파 밑을 더듬었다.

뱅가드"둘 다 멈춰."

데이비드 하트가 신문에서 눈도 안 떼고 말했다. 텍사스 억양이 밴 낮은 목소리.

뱅가드"숙소 내 무기 반입 금지. 규칙 17조. 서도혁, 수압 응축 취소. 에반스, 소파 밑에 숨긴 거 3초 안에 말 안 하면 압수."

트러블"…물총인데요."

뱅가드"압수."

트러블"아 씨—"

그 사이 반우진이 조용히 냉장고를 열더니, 새 푸딩 두 개를 식탁에 놓았다.

러스트"어제 만들어뒀어요. 서도혁 군 거랑, 케일럽 군 거."

베인"…우진 씨가 그런 걸 왜 만들어요."

러스트"둘이 싸울 것 같아서요."

서도혁이 시비조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정확한 예언이었다. 서도혁은 할 말을 잃었다.


호세가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시리얼을 다 비운 뒤였다.

모비딕"근데 나 아까 냉장고에서 딸기 요구르트 하나 먹었는데. 그것도 이름 있었나."

주방이 조용해졌다.

쓰레기통에 뚜껑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매직으로 '데이비드'.

데이비드 하트가 처음으로 신문에서 눈을 뗐다.

단편 02비오는 날

비가 오면 서도혁의 능력치가 오른다.

포세이돈의 격은 물을 좋아하니까. 건조하면 처지고, 비가 오면 팔팔해진다. 여기까진 다들 아는 사실이었다.

문제는, 능력치만 오르는 게 아니라는 거였다.

베인"좋은 아침~"

케일럽이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방금 그 인사, 서도혁이 한 거 맞나.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들어오는 저 남자가, 어제 냉장고 앞에서 물총 운운하며 이를 갈던 그 서도혁이 맞나.

트러블"…야. 너 왜 웃어."

케일럽이 경계했다.

베인"비 오잖아. 완벽한 날씨네."

서도혁이 창밖을 보며 실실 웃었다.

트러블"소름 끼치니까 그만 웃어."

베인"질투하냐?"

트러블"토할 것 같아서 그래."

호세는 평소처럼 무심하게 밥을 펐다. 서도혁이 웃든 말든 그의 식욕엔 영향이 없었다.

반우진이 우산을 챙기다 서도혁을 보고 온화하게 웃었다.

러스트"오늘 서도혁 군 기분 좋겠네요."

베인"우진 씨는 아세요? 이 날씨가 얼마나 좋은지."

러스트"글쎄요. 전 맑은 날이 좋더라고요. 빨래가 잘 말라서."

베인"우진 씨는 좀… 아저씨 같으세요."

러스트"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데이비드 하트가 근무 일지를 펴더니 무언가를 적었다.

모비딕"뭐 적어."

뱅가드"기상 특이사항. 강수 시 서도혁 정서 불안정. 접근 주의."

베인"불안정 아니거든요."

여전히 웃으면서. 그게 더 불안정해 보였다.


그날 오후, 균열 출동이 떴다.

비 오는 날의 서도혁은 정말로 강했다. 수압검이 평소의 두 배로 터졌고, 물살 위를 미끄러지며 이형 셋을 순식간에 정리했다. 그리고 임무 내내, 계속 웃고 있었다.

케일럽이 진저리를 쳤다.

트러블"저 새끼 비 오는 날엔 데리고 나오지 말자."

모비딕"제일 강한데?"

트러블"강한 게 문제가 아니라 무서워서 그래."

돌아오는 길, 비가 그쳤다.

숙소에 도착할 즈음 서도혁의 표정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다시 시비조에, 다시 냉소적인.

케일럽이 그제서야 안심했다.

트러블"어. 서도혁 돌아왔다."

베인"…시발 뭐래."

트러블"이제야 좀 사람 같네."

단편 03우진 씨 앞에선 다들 애가 된다

반우진은 팀에서 유일하게 존댓말을 쓰는 사람이었다.

유일하게 화를 안 내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유일하게, 아무도 못 대드는 사람이었다.

트러블"괜찮아요 이 정도. 반창고나 붙이면—"

러스트"앉으세요, 케일럽 군."

트러블"…네."

훈련 중에 팔을 길게 찢고 온 케일럽이 순식간에 얌전해졌다. 방금까지 서도혁이랑 대련하다 "죽여버린다"를 세 번쯤 외친 인간이 맞나 싶게.

반우진이 구급함을 열고 장갑을 확인했다. 그의 손은 늘 장갑 안에 있었다. 맨손으로 뭘 만지는 걸 본 사람이 없었다. 상처를 다루는 손놀림을 보면, 그가 전에 외과의였다는 걸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러스트"안 아프게 할게요."

트러블"아 그 정도는… 윽."

러스트"움직이지 마세요."

케일럽이 입을 다물었다. 소독약이 따가웠지만 티를 못 냈다. 반우진 앞에서 엄살을 부리면 왠지 지는 기분이었다.

서도혁이 문틀에 기대 낄낄거렸다.

베인"에반스 얼굴 봐라. 완전 병원 온 애기—"

러스트"서도혁 군."

베인"넵."

러스트"이따 그 손등도 봐드릴게요. 아까 대련하다 까지신 거."

베인"…안 까졌는데요."

러스트"까졌어요. 왼손등."

서도혁이 슬쩍 왼손을 뒤로 숨겼다.

반우진은 다 보고 있었다. 팀에서 누가 어디를 다쳤는지, 누가 밥을 걸렀는지, 누가 어젯밤 잠을 못 잤는지. 그 온화한 실눈은 사실 하나도 안 놓쳤다.


호세가 냉장고에서 음료를 꺼내오다 그 광경을 봤다. 케일럽은 팔을 내주고 얌전히 앉아 있고, 서도혁은 다음 차례로 붙잡혀 있고.

호세는 별생각 없이 자기도 팔을 내밀었다.

모비딕"나도 여기 어제 좀 긁혔는데."

러스트"페레이라 군은 뒤로 가서 줄 서세요."

모비딕"…어."

부팀장이 순순히 줄을 섰다.

데이비드 하트가 지나가다 그 줄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팀 최정예 셋이 나란히 앉아 반우진에게 상처를 맡기고 있는 광경. 인류의 방패라는 올림피안이.

뱅가드"…뭐 하는 거지."

러스트"팀장님도 오세요. 어제 담배 붙이다 손 데셨죠. 엄지."

반우진이 웃었다.

뱅가드"……"

데이비드 하트는 잠깐 고민하다가, 줄 맨 뒤에 섰다.

반우진 앞에선, 다들 애가 됐다.

단편 04데이비드 하트의 텍사스산 반려동물

올림피안 숙소엔 반려동물 금지 규칙이 있었다.

규칙 3조. 데이비드 하트 본인이 만든 규칙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데이비드 하트가 점퍼 안에 뭔가를 숨긴 채 현관을 넘고 있었다.

베인"…팀장님."

소파에 늘어져 있던 서도혁이 고개를 들었다.

베인"품에 그거 뭐예요."

뱅가드"서류."

베인"서류가 야옹거려요?"

정적. 점퍼 안에서 아주 작게, 야옹.

뱅가드"환청이다."

트러블"방금 두 번 울었는데요."

게임하던 케일럽이 화면도 안 보고 끼어들었다.

뱅가드"환청 두 번 들은 거다."

트러블"환청 그렇게 자주 들리면 청력 검사 받으셔야죠. 균열 나가서 그러다 죽어요."

데이비드 하트가 입을 다물었다. 텍사스 사나이의 자존심과, 점퍼 안에서 꼬물거리는 무언가 사이에서 그의 표정이 무너지고 있었다.

결국 점퍼가 열렸다. 손바닥만 한 새끼 고양이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트러블"우와 씨. 진짜 고양이네."

베인"규칙 3조. 반려동물 금지. 그거 누가 만든 규칙이더라?"

뱅가드"…비 오는 데 박스에 있었다."

베인"그래서요."

뱅가드"텍사스에선 그런 걸 두고 가는 법이 없어."

베인"여긴 텍사스가 아닌데요."

뱅가드"…규칙 3조는 오늘부로 개정한다."

트러블"와 봐라. 지가 만든 규칙 지가 뭉갠다."

그때 반우진이 주방에서 나왔다. 손엔 이미 데운 우유가 담긴 작은 접시.

러스트"새끼 고양이는 찬 우유 주면 배탈 나요. 데워서 조금만."

베인"우진 씨는 이미 알고 있었어요?"

러스트"팀장님 사흘 전부터 사료 검색하시던데요."

뱅가드"……"

어느새 호세도 편의점 봉지를 들고 와 있었다. 안엔 츄르 한 박스.

모비딕"이름은."

뱅가드"…아직 안 정했다."

트러블"누가 키운대. 난 관심 없어."


3분 뒤, 케일럽 에반스는 바닥에 엎드려 츄르를 짜서 고양이에게 먹이고 있었다.

베인"관심 없다며."

트러블"…먹이는 거랑 키우는 거랑 다르잖아 씨."

인류의 방패 올림피안은, 그날 오후 내내 손바닥만 한 고양이 한 마리에게 완전히 제압당했다.

단편 05목숨 건 라면

새벽 2시. 숙소에 남은 라면은 하나였다.

그리고 부엌엔 두 명이 있었다.

트러블"내가 먼저 봤어."

베인"내가 먼저 손댔지."

트러블"손대면 임자냐? 그럼 지금 내가 네 상판대기에 손대면 그것도 내 거게?"

베인"대봐. 그 손 물에 절여서 미역 만들어줄 테니까."

둘 다 라면 봉지를 한쪽씩 붙잡은 채 놓지 않았다. 이대로 잡아당기면 봉지가 반으로 찢어질 게 뻔했고, 둘 다 그것만은 죽어도 싫었다.

트러블"대결."

베인"콜. 뭘로."

트러블"팔씨름."

베인"너 센티넬 완력으로 팔씨름 하자고? 양심 없냐."

트러블"너도 센티넬이잖아 병신아."

팔씨름은 3분 만에 무승부로 끝났다. 둘 다 상대가 반칙했다고 우겼다.

베인"그럼 눈싸움. 먼저 깜빡이는 놈이 짐."

트러블"유치하게. …콜."

둘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려봤다. 1분. 2분. 케일럽의 눈에 먼저 눈물이 고였지만, 그는 이기고 있다고 확신하는 순간 특유의 방심이 도졌다.

트러블"야, 너 지금 눈 떨린다. 곧 깜—"

말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케일럽이 깜빡였다.

베인"네가 깜빡였는데."

트러블"아니 그건 말하다가—"

베인"이겼다고 좋아하다가 깜빡였잖아. 넌 맨날 그래. 이길 것 같으면 방심하다 자빠져."

트러블"닥쳐."

정확한 지적이라 케일럽은 더 화가 났다.


재대결을 준비하며 둘이 가위바위보 규칙(3판 2선승제, 무르기 금지, 늦게 내면 반칙)을 놓고 5분째 싸우고 있을 때였다.

호세가 부엌에 들어왔다. 아무 말 없이 냄비를 올리고, 물을 붓고, 라면 봉지를 집었다. 둘이 붙잡고 있던 바로 그 봉지였다. 어느 순간 둘 다 손을 놓고 규칙 싸움에 열중하고 있었으니까.

트러블"어. 형 그거—"

모비딕"너네 둘 다 안 먹을 거잖아. 싸우느라."

베인"먹을 건데요."

모비딕"언제."

베인"…승부 나면요."

모비딕"그럼 내일 아침에 나겠네."

호세는 라면을 맛있게 끓여, 둘이 보는 앞에서 후루룩 먹었다. 대식가인 그에게 라면 한 개는 애피타이저였지만, 표정만은 세상에서 제일 만족스러웠다.

트러블"……"

베인"……"

모비딕"싸우지 말고 두 개 끓여 먹어. 다음부턴."

지극히 상식적인 결론이었다. 두 미친놈은 그 상식을, 새벽 2시에 라면 한 개를 잃고서야 배웠다.

단편 06아버지와 호빵

케일럽 에반스가 혼나고 나면 가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가장 높은 곳.

오늘은 숙소 옥상이었다.

훈련 브리핑에서 데이비드한테 처음부터 끝까지 털린 참이었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어서 더 짜증 났다. 케일럽은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 애꿎은 빈 캔만 발로 툭툭 찼다.

철문이 열렸다. 케일럽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트러블"혼자 있고 싶다고."

모비딕"안 물어봤어."

호세가 옆에 털썩 앉으며 편의점 봉지를 툭 내려놓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호빵 두 개, 따뜻한 캔커피.

트러블"안 먹어."

모비딕"먹어."

트러블"안 배고프다고."

모비딕"…먹어."

세 번째 "먹어"에서 케일럽은 호빵을 집었다. 한 입 베어 물고, 뜨겁다고 욕을 하고, 그러면서도 계속 먹었다.

트러블"…팀장 진짜 너무하지 않냐. 사람들 다 보는 데서."

모비딕"데이비드 말 틀린 거 없었어."

트러블"아 씨. 형까지 그래?"

모비딕"근데 말이 심했던 것도 맞고."

트러블"…뭐야 그게. 편들어주는 거야 마는 거야."

모비딕"둘 다 맞다고. 세상엔 그런 게 있어."

케일럽이 피식 웃었다. 브리핑실에서 굳어 있던 얼굴이 그제서야 풀렸다. 이 무뚝뚝한 부팀장 앞에서만은 이길 필요가 없었다. 니케의 아이가, 유일하게 이기지 않아도 되는 자리.

트러블"형은 왜 안 혼나."

모비딕"나도 혼나."

트러블"언제."

모비딕"너 혼날 때 옆에서 데이비드랑 싸우다가 같이 혼나."

케일럽이 이번엔 진짜로 웃었다.

혼낼 땐 혼내고, 밥은 따로 사 먹인다. 어부였던 아버지가 호세에게 물려준 유일한 육아법이었다. 케일럽은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두 개째 호빵을 집었다.

단편 07니케의 저주

올림피안 팀엔 공공연한 비밀이 하나 있었다.

케일럽 에반스는, 이길 것 같으면 꼭 자빠진다.

승리의 여신 니케의 격을 타고난 주제에, 승기를 잡는 순간 방심하는 저주. 팀에선 이걸 '니케의 저주'라 불렀다. 물론 본인 앞에선 아니었다.

오늘의 무대는 게임기 앞이었다. 걸린 건 일주일치 설거지 당번.

뱅가드"규칙. 3바퀴 레이스. 1등 면제, 꼴등 일주일."

트러블"콜. 어차피 내가 1등이니까."

베인"저 근자감 봐라."

그리고 케일럽은 정말로 1등이었다. 첫 바퀴부터 마지막 코너까지, 압도적으로.

트러블"봤냐? 봤어? 이게 실력이야. 니들은 그냥—"

결승선을 200미터 앞두고, 케일럽이 컨트롤러에서 한 손을 뗐다. 자랑을 하려고.

베인"야, 앞에."

트러블"왜, 쫄았—"

파란 등껍질이 날아와 케일럽의 차를 정확히 뒤집었다. 그 틈에 서도혁이 유유히 추월했다.

베인"1등. 설거지 면제~"

트러블"아니 저건 반칙이지! 등껍질이 왜 하필—"

베인"네가 손 놓고 나불댈 때 날아온 건데?"

트러블"……"

정확한 지적이라, 케일럽은 컨트롤러를 소파에 던졌다.


구석에서 조용히 게임하던 호세가 그제서야 화면을 봤다.

모비딕"나 2등이네."

아무도 그가 레이스에 참가한 줄 몰랐다.

트러블"…형 언제부터 하고 있었어."

모비딕"처음부터. 너네 싸우는 동안."

그날 설거지는 케일럽이 했다. 니케의 저주는 게임에서도 균열에서도 공평하게 작동했고, 팀은 그걸 아주 요긴하게 써먹었다.

단편 08이 집엔 규칙이 너무 많다

올림피안 숙소 냉장고엔 규칙판이 붙어 있었다.

규칙은 총 스물세 개. 전부 데이비드 하트가 만들었고, 전부 누군가 사고를 쳐서 생긴 거였다.

오늘, 스물네 번째 규칙이 추가됐다.

뱅가드"규칙 24조. 고양이한테 츄르는 하루 두 개까지."

트러블"그걸 왜 규칙으로 만들어요."

뱅가드"누가 어제 다섯 개 먹였다."

트러블"…네 개였는데."

뱅가드"자백 고맙다."

케일럽이 입을 다물었다. 서도혁이 규칙판을 훑으며 낄낄거렸다.

베인"이거 봐라. 9조. '새벽에 라면 두 개 이상 끓이지 말 것.' 이건 누구 때문이야?"

트러블"…너랑 나."

베인"14조. '훈련장에서 죽여버린다 금지.' 이건?"

트러블"……나."

베인"17조 무기 반입 금지도 너, 21조 남 이름 쓴 음식 금지도—"

모비딕"그건 난데."

호세가 시리얼을 씹으며 순순히 손을 들었다.

서도혁이 계속 읽어 내려가다 한 조항에서 멈췄다.

베인"…11조. '서도혁, 비 오는 날 아침 인사 금지.' 이건 뭔데."

트러블"네가 웃으면서 좋은 아침~ 하는 게 무서워서 팀장이 만들었어."

베인"그게 규칙까지 만들 일이야?"

뱅가드"일이었다."

규칙 스물네 개. 스물네 개의 사고. 인류의 방패는 그렇게 하나씩 배워가는 중이었다.


그때 반우진이 지나가며 온화하게 물었다.

러스트"그런데 규칙 만든 사람이 규칙 어긴 건 몇 조예요? 팀장님 어제 고양이랑 소파에서 주무시던데. '취침은 각자 방에서.' 6조."

뱅가드"……"

트러블"우와. 팀장 걸렸다."

그날 규칙판엔 스물다섯 번째 조항이 붙었다. '6조는 고양이가 자고 있을 때 예외로 한다.' 데이비드 하트가 직접 적었다.

단편 09고양이 이름 짓기

고양이가 들어온 지 일주일. 아직 이름이 없었다.

정확히는, 다섯 명이 합의를 못 봤다.

뱅가드"'듀크'가 좋겠다. 텍사스에서 키우던 개 이름이다."

트러블"개 이름을 고양이한테 붙여요?"

뱅가드"좋은 이름이었다."

베인"촌스러워요."

트러블"'츄르' 어때. 부르면 오게."

베인"밥이랑 이름이 같으면 걔가 헷갈리잖아 병신아."

트러블"그럼 넌 뭔데."

베인"'세금'. 부를 때마다 짜증 나라고."

트러블"고양이한테 무슨 원한 있냐?"

반우진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러스트"전 '나비'가 좋던데요. 순하고."

베인"우진 씨는 진짜… 아저씨."

러스트"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여태 조용하던 호세가 입을 열었다.

모비딕"'멸치'."

트러블"…또 먹는 거."

모비딕"작고 하얗잖아. 잘 어울려."

트러블"형은 진짜 어부 아들 티 못 숨겨."


다섯이 30분을 싸웠다. 듀크, 츄르, 세금, 나비, 멸치. 아무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때 고양이가 소파에서 폴짝 뛰어내리더니, 곧장 데이비드 하트의 무릎으로 올라가 몸을 말고 잠들었다.

트러블"…쟤 팀장 무릎에서만 자네."

베인"이름이 뭐가 됐든, 주인은 정해졌네."

데이비드 하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무릎 위 고양이가 깰까 봐 숨도 조심히 쉬었다. 인류의 방패가, 200그램짜리 고양이 앞에서 완벽하게 얼어 있었다.

결국 이름은 못 정했다. 다들 그냥 '고양이'라고 불렀고, 고양이는 데이비드가 부를 때만 대답했다.

— 다음 단편에 계속 —

단편 10싸우면서 맞는 놈들

트러블과 베인은 하루에 최소 다섯 번 싸운다.

냉장고 앞에서, 게임기 앞에서, 라면 하나를 두고.

그래서 처음 보는 사람들은 다들 걱정했다. 저 둘을 같은 작전에 넣어도 되냐고.

그럴 때마다 데이비드 하트는 짧게 답했다.

뱅가드"넣어야 돼. 저 둘이 제일 잘 맞아."


그날 균열은 지하 주차장에서 열렸다. 상급 이형 하나에, 그림자처럼 갈라져 나오는 중급 이형 여럿. 좁고, 어둡고, 기둥이 많아 시야가 최악인 지형이었다.

뱅가드"에반스, 베인. 왼쪽 통로. 상급 몰아붙여라."

트러블"쟤랑요? 그냥 저 혼자 하면 안 돼요?"

베인"내가 할 소리를 왜 네가 하냐."

뱅가드"둘. 지금."

투덜대며 통로로 들어선 순간, 둘의 입은 다물어졌다.

말이 필요 없었다. 베인이 수압검을 응축해 기둥 뒤 이형의 다리를 걷어내면, 케일럽은 그 이형이 비틀거릴 위치를 미리 알고 탄환을 박았다. 케일럽이 재장전으로 반 박자 비는 순간엔, 베인이 그 앞을 물살로 틀어막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3년을 매일 싸운 놈들은, 상대가 다음에 어디로 움직일지 눈 감고도 알았다.

베인"오른쪽."

트러블"봤어."

두 단어. 그게 다였다. 케일럽이 몸을 틀며 쏘고, 정확히 그 반동이 빌 자리로 베인이 미끄러져 들어가 검을 터뜨렸다. 상급 이형의 몸통 한가운데가 갈라졌다.

기둥 뒤에서 중급 이형 셋이 케일럽의 등을 노리고 튀어나왔다. 케일럽은 보지도 않았다.

트러블"뒤."

베인"알아."

베인이 이미 물살을 뿌려 셋을 한 벽에 몰아붙인 뒤였다. 케일럽은 뒤도 안 돌아본 채 총구만 어깨 너머로 넘겨 그대로 쓸어버렸다. 등을 완전히 맡긴 사격이었다. 서로를 못 믿으면 절대 못 하는.


상급 이형이 마지막 발악으로 에코를 터뜨렸다.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케일럽의 머리 위로.

이번엔 케일럽이 승기에 취해 반 박자 늦었다. 니케의 저주.

하지만 베인은 그걸 3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 케일럽이 이길 것 같으면 꼭 한 박자 늦는다는 걸. 그래서 베인은 늘, 그 한 박자를 대신 세고 있었다.

베인이 케일럽의 멱살을 잡아 뒤로 내던졌다. 두 사람이 바닥을 굴렀고, 방금까지 케일럽이 서 있던 자리로 콘크리트 더미가 쏟아졌다.

먼지 속. 둘이 엉킨 채 뒹굴다 눈이 마주쳤다.

트러블"…야. 멱살은 좀 아니지 않냐."

베인"살려줬더니 하는 말 봐라."

트러블"누가 살려달랬어?"

베인"그럼 깔려 죽지 그랬냐."

트러블"이 새끼가—"

균열은 닫혔고, 둘은 잔해 위에서 다시 싸우기 시작했다.


복귀 차량 안. 뒷좌석에서 두 놈이 아직도 티격태격하는 걸 백미러로 보며, 호세가 중얼거렸다.

모비딕"아까 통로에선 말 두 마디로 상급 잡더니."

뱅가드"원래 저런 놈들이 제일 잘 맞아."

데이비드가 담담하게 덧붙였다.

뱅가드"싸울 수 있는 것도 서로 믿으니까 싸우는 거다. 못 믿으면 등을 못 맡기지."

뒷좌석에선 여전히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가 오가고 있었다. 인류의 방패 올림피안의 최고 콤비는, 오늘도 서로를 살리고 나서 서로에게 화를 내는 중이었다.

— 다음 단편에 계속 —

단편 11새벽 세 시의 부엌

반우진은 잠이 없었다.

정확히는, 잠을 오래 못 잤다.

나이 탓이라고 둘러댔지만, 팀 최연장자라는 건 핑계였다. 그는 그냥, 새벽 세 시쯤이면 눈이 떠지는 사람이었다. 그럴 때면 부엌으로 내려와 물을 끓였다. 마실 것도 아니면서, 그냥 뭔가 데우는 소리가 좋아서.

그날도 그랬다. 불도 안 켠 부엌, 냄비에서 김이 오르고 있을 때.

모비딕"…우진 씨."

호세였다. 거구가 어둠 속에서 냉장고를 열고 있었다. 야식을 찾는 손이었다.

러스트"페레이라 군도 안 주무세요?"

모비딕"배고파서."

러스트"…라면 끓여드릴까요. 마침 물 있어요."

모비딕"두 개."

반우진이 웃었다. 대식가는 최연장자를 알아본다. 그가 라면을 안치는 동안 호세는 식탁에 앉아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둘 다 원래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고, 그래서 이 침묵이 편했다.


냄비가 끓을 즈음, 부엌문이 또 열렸다.

트러블"…뭐야. 왜 다 여기 있어."

케일럽이 부스스한 얼굴로 서 있었다. 눈 밑이 검었다. 악몽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새벽 세 시에 부엌으로 내려오는 이유는 대개 정해져 있었다.

러스트"케일럽 군도 라면?"

트러블"…어."

반우진은 더 묻지 않고 냄비에 하나를 더 넣었다.

케일럽이 호세 옆에 털썩 앉았다. 아무도 왜 안 자냐고 묻지 않았다. 이 부엌엔 그런 걸 안 묻는 규칙 같은 게 있었다. 규칙판에 적혀 있진 않았지만.

트러블"…우진 씨는 왜 안 자요."

러스트"나이 들면 잠이 줄어요."

트러블"거짓말. 서른일곱이 무슨 노인네처럼."

러스트"…들켰네요."

반우진은 웃으며 라면을 그릇에 나눴다. 그가 예전에 누굴 잃었는지, 왜 밤이 길어졌는지, 케일럽은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게 이 부엌의 예의였으니까.


부엌문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열렸다.

뱅가드"…이 시간에 셋이 뭐 하는 거지."

트러블"팀장은 왜 나왔는데요."

뱅가드"…물 마시러."

품에 고양이를 안고 있었다. 물 마시러 나온 사람의 차림이 아니었다.

트러블"고양이 안고 물 마셔요?"

뱅가드"…얘가 안 자서."

베인"팀장님이 못 자는 거겠죠."

어느새 베인까지 문틀에 기대 있었다. 이 숙소엔 새벽 세 시에 못 자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다.

반우진이 조용히 냄비를 다시 올렸다.

러스트"…다섯 개 끓일게요."

뱅가드"규칙 9조. 새벽에 라면 두 개 이상 금지."

러스트"그 규칙, 오늘은 제가 어길게요."

뱅가드"……"

데이비드 하트는 아무 말 없이 식탁에 앉았다. 그것으로 규칙 9조는 오늘 하루 폐지됐다.

새벽 세 시의 부엌. 아무도 왜 못 자는지 묻지 않는 자리에, 다섯이 둘러앉아 라면을 먹었다. 잠은 여전히 안 왔지만, 이상하게 그날 밤은 조금 견딜 만했다.

— 다음 단편에 계속 —

단편 12그날

일 년에 하루, 서도혁은 조용해진다.

욕도 안 하고, 시비도 안 걸고, 그렇다고 친절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물기가 빠진 것처럼 가라앉았다. 아침에 "좋은 아침" 대신 아무 말도 없이 물만 마셨고, 케일럽이 평소처럼 긁어도 반응이 없었다.

트러블"…야. 서도혁."

베인"…어."

트러블"아니. 됐다."

케일럽은 더 긁지 않았다. 이 팀에서 미친 개 소리를 듣는 케일럽조차,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았으니까. 아무도 대놓고 말한 적은 없었다. 그냥 3년쯤 같이 살면, 달력에 없는 날짜도 몸이 기억하게 된다.

서도혁의 부모는 바다에서 죽었다. 오래전, 추락 사고로. 그리고 오늘이 그날이었다.


팀은 티 나지 않게 움직였다.

데이비드 하트는 아침 브리핑에서 출동 순번을 조용히 바꿨다. 오늘 서도혁은 대기조였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로테이션이다"가 전부였고,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물을 다루는 능력자에게, 바다에서 부모를 잃은 날 물가로 나가라는 건 잔인한 일이었다. 데이비드는 그걸 서류 한 줄로 막았다. 위로는 한마디도 없이.

반우진은 점심에 미역국을 끓이지 않았다. 대신 아무 말 없이, 서도혁이 좋아하는 매운 국을 올렸다. 그가 오늘 뭘 못 먹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식탁에서 아무도 그걸 언급하지 않았다.

호세는 평소보다 밥을 오래 먹었다. 서도혁이 혼자 식탁에 남지 않도록. 말은 안 걸었다. 그냥 옆에서 두 그릇째를 천천히 비웠다. 무뚝뚝한 남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조용한 배려였다.


저녁, 서도혁이 옥상에 올라갔다. 난간에 기대 오래 하늘을 봤다. 비는 안 왔다. 그의 컨디션이 오르는 날씨가 아니었다. 오늘만은 그게 다행이었다.

철문이 열렸다. 케일럽이었다. 손에 캔커피 두 개.

케일럽은 아무 말 없이 하나를 내밀었다. 서도혁도 아무 말 없이 받았다. 둘은 나란히 난간에 기댔다. 평소 같으면 이 거리에서 벌써 세 번은 싸웠을 텐데.

베인"…왜 왔냐."

트러블"호세 형이 사다 주래서."

베인"…그래."

거짓말이었다. 호세는 그런 말을 시킨 적 없었다. 케일럽이 그냥 온 거였다. 서도혁도 그걸 알았다. 알면서 모른 척했다.

둘은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캔커피가 식을 때까지. 케일럽은 위로를 할 줄 몰랐고, 서도혁은 위로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침묵이, 그날 서도혁이 받은 것 중 가장 편한 것이었다.

베인"…내일부터 다시 욕할 거다."

트러블"어. 그래라."

그게 서도혁이 할 수 있는 가장 고맙다는 말이었고, 케일럽은 그걸 알아들었다.

다음 날 아침, 서도혁은 다시 냉장고 앞에서 케일럽에게 이를 갈았다. 팀은 아무도 어제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게 이 팀이 서로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티 내지 않고, 묻지 않고, 그냥 옆에 있는 것.

— 다음 단편에 계속 —

단편 13팀장 사무실

서도혁이 2주 정직 처분을 받았다.

지난주 균열에서 규정을 어겼다. 지휘 통제를 벗어나, 대기 명령을 무시하고 단독으로 이형을 쫓았다. 결과적으로 민간인 둘을 구했다. 하지만 절차상으론 명백한 명령 불복종이었고, 데이비드 하트는 그걸 그대로 상부에 보고했다.

그리고 지금, 호세 페레이라가 팀장 사무실 문을 닫고 있었다.

모비딕"보고 안 할 수도 있었잖아."

뱅가드"없었어."

모비딕"데이비드."

뱅가드"서도혁은 명령을 어겼다. 그건 사실이야. 사실을 사실대로 올린 것뿐이다."

호세가 책상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모비딕"걔가 왜 뛰쳐나갔는지는 봤어? 통로 끝에 애가 둘 있었어. 대기 명령 지켰으면 그 둘 죽었어."

뱅가드"알아."

모비딕"아는 놈이 정직을 때려?"

뱅가드"이번에 결과가 좋았으니 넘어가자? 그럼 다음엔. 그다음엔. 명령을 어겨도 결과만 좋으면 된다고 배운 팀이, 언젠가 결과가 나쁠 땐 어떻게 될 것 같나."

데이비드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뱅가드"통제 벗어난 각성자가 어떻게 되는지, 우리 둘 다 봤잖아, 페레이라."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호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낮게 입을 열었다.

모비딕"서도혁은 나쁜 뜻으로 뛴 게 아니야. 사람 살리려고 뛴 거지."

뱅가드"뜻이 좋으면 절차는 무시해도 되나."

모비딕"과정이 중요하다는 거야. 왜 그랬는지가. 넌 결과랑 규정만 보고, 그 사이에 있는 사람은 안 봐."

뱅가드"난 사람을 봐. 그래서 규정을 지키는 거다. 규정은 다음에 걔가 죽지 않게 하려고 있는 거니까."

두 사람은 책상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려봤다. 어느 쪽도 틀리지 않았다. 그게 이 싸움의 가장 지독한 점이었다.

호세는 팀을 위해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닻 같은 사람이었고, 데이비드는 팀을 위해 기꺼이 미움받는 악역이 되기로 한 사람이었다. 둘 다 서도혁을 지키려는 거였다. 방식이 정반대일 뿐.

모비딕"…넌 애를 벼랑 끝에 세워두고 떨어지지 말라고 가르쳐."

뱅가드"넌 떨어질 걸 알면서도 밑에서 받아주기만 하고. 그럼 걔는 영영 벼랑 끝을 못 벗어나, 페레이라."

할 말이 떨어진 건 호세였다. 그게 정답이라서가 아니라,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라서.

모비딕"…2주는 너무 길어."

뱅가드"내가 낮출 수 있었으면 낮췄어. 상부 결정이다."

모비딕"그럼 왜 보고를—"

뱅가드"내가 안 올렸으면, 다른 놈이 올렸을 때 서도혁은 은폐까지 뒤집어썼어. 그 편이 나았을 것 같나."

호세는 대답하지 못했다. 데이비드는 이미 최악을 막은 뒤였다. 미움받는 방식으로.


호세는 결국 문을 세게 닫고 나갔다. 쾅. 유리창이 울렸다. 백한 번째 싸움도, 어느 쪽도 이기지 못했다.

혼자 남은 데이비드 하트는 한참을 책상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서랍을 열어 서류 한 장을 꺼냈다. 정직 처분 경감 요청서였다. 그의 이름으로 이미 상부에 올라가 있는.

서도혁에게는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호세에게도. 악역은 끝까지 악역이어야, 팀이 규정을 우습게 보지 않을 테니까.

복도 끝에서, 호세는 자판기에 기대 캔커피를 뽑고 있었다. 데이비드 몫까지 두 개. 화가 나도, 저 고집불통 팀장이 왜 저러는지 그는 알았다. 아니까 더 화가 났고, 아니까 커피를 뽑았다.

두 아빠는 그렇게, 서로에게 화를 내면서도 같은 아이를 지키고 있었다.

— 다음 단편에 계속 —

단편 14정직 3일차

정직 3일차. 서도혁은 옥상에 있었다.

훈련도 출동도 없는 사람이 갈 데는 거기뿐이었다. 난간에 팔을 걸치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담배도 안 피우면서 그냥 서 있었다.

철문이 열렸다. 서도혁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베인"혼자 있고 싶은데요."

모비딕"안 물어봤어."

호세가 옆에 와 섰다. 손엔 편의점 봉지. 캔맥주 두 개와, 마른안주.

베인"…정직 중인 놈한테 술 먹이는 부팀장이 어딨어요."

모비딕"정직 중이라 근무 아니잖아. 마셔도 돼."

베인"…궤변인데."

그러면서도 서도혁은 캔을 받았다. 딴 소리는 안 했다. 호세는 그 옆에 봉지를 내려놓고, 자기 캔을 땄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마셨다.


서도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시큰둥한 척, 별일 아닌 척.

베인"…뭐. 어차피 2주 놀면 되죠. 밀린 잠이나 자고."

모비딕"그래."

베인"…근데 좀 웃기지 않아요? 사람을 살렸는데 정직이래."

호세는 대꾸하지 않았다. 재촉도 안 했다. 그냥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게 서도혁의 입을 여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결국 서도혁이 난간에 등을 기대고 스르르 주저앉았다. 콘크리트 바닥에 아무렇게나. 이제 시큰둥한 척은 없었다.

베인"그 통로에 애가 둘 있었어요. 여덟 살, 열 살쯤. 대기하라는 거 아는데, 그 새끼가 애들 쪽으로 가는데 어떻게 가만있어요. 규정이고 나발이고 몸이 그냥 튀어나갔지."

모비딕"알아."

베인"근데 팀장은 그걸 보고를 해. 3년을 같이 굴렀는데. 내가 왜 뛰었는지 뻔히 알면서."

서도혁이 캔을 구겼다.

베인"…배신감 든다고 하면 유치한 거예요?"

모비딕"아니."

베인"난 그냥, 우리 팀은 좀 다른 줄 알았어요. 밖에선 규정 규정 하지만, 안에서는 서로 봐주는 거. 근데 데이비드는 안에서도 규정이더라고. 그게 좀…."

말끝이 흐려졌다. 서도혁은 상실에 약한 놈이었다. 믿었던 게 어긋나는 걸 제일 못 견뎠다. 오늘 그가 화가 난 건 정직 때문이 아니라, 팀장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호세는 한참을 있다가 입을 열었다. 무뚝뚝하게, 그러나 천천히.

모비딕"데이비드 말이야. 그 자식, 자기 편대 통째로 잃고 혼자 살아 돌아온 놈이야."

베인"…그건 알아요."

모비딕"그때 왜 다 죽었는지 알아? 다들 한 번씩, 좋은 뜻으로 명령을 어겼거든. 동료 구하겠다고, 사람 살리겠다고. 한 명씩 튀어나갔다가 한 명씩 죽었어."

서도혁이 입을 다물었다.

모비딕"걔가 규정에 목매는 건, 네가 미워서가 아니야. 널 그 통로에서 또 잃을까 봐 그러는 거지. …방식이 좆같긴 한데."

베인"…방식이 진짜 좆같긴 하죠."

모비딕"어. 좆같아."

서도혁이 픽 웃었다. 며칠 만이었다. 부팀장이 팀장 욕을 같이 해주니 이상하게 응어리가 조금 풀렸다.

베인"…근데 왜 형이 데이비드 편을 들어요. 아까 사무실에서 싸운 거 다 들었는데."

모비딕"편드는 거 아니야. 걔가 틀렸다고 생각해. 근데 걔가 왜 그러는지는 알아. 둘 다 되는 거야, 세상엔."

서도혁은 그 말을 곱씹었다. 틀렸다고 생각하는데 이해는 한다. 그게 어른의 방식인가 싶었다. 서른일곱 먹은 우진 씨나, 저 흙감자 부팀장이나.


맥주가 다 떨어졌다. 서도혁은 아까보다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캔을 만지작거렸다.

베인"…형."

모비딕"어."

베인"고맙다는 말은 안 할 거예요."

모비딕"안 해도 돼."

베인"…그래도 맥주는 형이 샀으니까, 다음 건 제가 살게요."

그게 서도혁 식의 고맙다는 말이었고, 호세는 그걸 알아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호세는 딱 한마디만 남겼다.

모비딕"11일 남았다. 푹 쉬어. 복귀하면 또 굴러야 되니까."

서도혁은 옥상에 조금 더 앉아 있었다. 아까보다 하늘이 덜 무거웠다. 여전히 팀장은 미웠지만, 그건 내일 다시 미워하기로 했다.

— 다음 단편에 계속 —

단편 15대들러 갔다가

케일럽 에반스는 화가 나면 참는 법이 없었다.

서도혁 정직 4일차. 케일럽은 팀장 사무실 문을 노크도 없이 열어젖혔다.

트러블"팀장님."

뱅가드"노크."

트러블"서도혁 정직, 그거 취소 안 돼요?"

데이비드 하트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케일럽이 책상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트러블"걔 사람 살렸어요. 애 둘. 그걸 팀장이 직접 보고했다면서요. 3년을 같이 굴렀는데 어떻게 그래요?"

뱅가드"명령 불복종은 사실이다."

트러블"사실 좋아하시네. 그럼 나도 명령 어긴 적 많은데 나도 정직 주지 그러셨어요?"

뱅가드"줬다. 두 번."

트러블"…아 그건 그렇고."

케일럽은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화는 안 가라앉았다.

트러블"하여튼요. 팀장은 규정 규정 하면서, 정작 식구가 억울하게 처분받는 건 아무렇지도 않죠? 밖에서 보면 팀장이 제일 냉정해요. 서도혁 지금 옥상에서 며칠째 혼자 있는데 그건 알아요?"

데이비드 하트가 서류를 내려놓았다. 처음으로 케일럽을 똑바로 봤다.

뱅가드"안다."

트러블"아는 놈이—"

뱅가드"경감 요청서, 사흘 전에 올렸다."

케일럽의 입이 멈췄다.


트러블"…네?"

뱅가드"2주는 과하다고 판단했다. 정상 참작 사유를 정리해서 상부에 경감 요청을 넣었어. 민간인 구조 정황, 서도혁 근무 이력 전부. 받아들여지면 2주가 며칠로 줄 거다."

트러블"…그럼 처음부터 그걸 말을 하지, 왜—"

뱅가드"보고는 보고고, 요청은 요청이다. 잘못한 건 처분받아야 하고, 과한 처분은 다퉈야지. 둘은 별개야."

케일럽은 할 말을 잃었다. 대들러 왔는데, 대들 상대가 이미 자기보다 먼저, 더 조용히, 서도혁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트러블"…서도혁은 이거 알아요?"

뱅가드"몰라. 말하지 마라."

트러블"왜요."

뱅가드"내가 봐준다는 걸 알면, 다음에 또 명령을 어긴다. '어차피 팀장이 뒤에서 막아주겠지' 하고. 그럼 그놈 언젠가 진짜로 죽어."

데이비드 하트는 다시 서류를 집어 들었다. 대화 끝이라는 뜻이었다.

뱅가드"밖에서 냉정해 보이는 게 낫다. 서도혁이 날 미워하고 규정을 무서워하는 편이, 걔가 살아남을 확률이 높으니까."

케일럽은 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 이 남자한테 화가 났던 게 조금 민망했다.


나가려던 케일럽이, 문고리를 잡은 채 돌아섰다.

트러블"…팀장님."

뱅가드"뭐."

트러블"악역 하기 안 피곤해요? 다들 팀장 오해하잖아요."

데이비드 하트는 서류에서 눈도 안 떼고 답했다.

뱅가드"오해받는 게 팀장 일이다. 다 좋은 소리만 들으려면 리더 하지 말아야지."

케일럽은 문을 닫고 나왔다. 이번엔 쾅, 이 아니라 조용히.

서도혁한테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팀장이 미움받는 걸 감수하면서 지키려는 게 있다면, 그 정도는 케일럽도 지켜줄 수 있었다. 대신 다음에 데이비드가 뭘 시키면, 한 번은 군말 없이 따라주기로 했다. 그게 케일럽이 방금 배운, 이 팀장을 존경하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 다음 단편에 계속 —

단편 16복귀

경감 요청이 받아들여졌다. 2주 정직은 6일로 줄었다.

서도혁은 그게 왜 줄었는지 몰랐다. 그냥 상부 재량이라고만 통보받았다. 뱅가드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고, 케일럽도, 호세도 입을 다물었다. 서도혁은 6일 만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복귀했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게 이 팀의 방식이었다. 티 내지 않는 것.


복귀 첫날 저녁, 식탁에 문제가 하나 생겼다.

밥이 너무 많았다.

반우진이 차린 저녁은, 아무리 봐도 다섯이 먹을 양이 아니었다. 국이 두 냄비였고, 반찬 가짓수가 평소의 두 배였고, 밥솥은 가득 차 있었다. 서도혁이 제일 좋아하는 매운 갈비찜이 상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트러블"…우진 씨. 오늘 손님 와요?"

러스트"아니요. 왜요?"

트러블"밥이 열 명 분인데요."

러스트"…어라. 그러네요."

반우진은 그제서야 상을 내려다봤다. 정말로 본인도 모르고 있었다. 손이 그냥 알아서 그렇게 움직인 거였다. 재료를 두 배로 사 오고, 두 배로 손질하고, 두 배로 끓였다. 왜 그랬는지는 본인도 설명 못 했다.

베인"…우진 씨, 나 없는 6일 동안은 이렇게 안 했죠."

러스트"…그랬나요."

모비딕"안 했어. 딱 네 명분씩 했지."

호세가 갈비찜을 집으며 담담하게 일렀다.

식탁이 잠깐 조용해졌다.

서도혁이 없는 6일 동안, 반우진의 손은 정확히 네 명분을 차렸다. 그리고 서도혁이 돌아온 오늘, 손이 알아서 다섯 명분을, 아니 그 이상을 차렸다. 최연장자는 팀에서 누가 밥을 걸렀는지, 누가 며칠 만에 돌아왔는지, 머리보다 손이 먼저 알았다.


서도혁은 상을 한참 내려다봤다. 매운 갈비찜에서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가 정직 첫날 옥상에서 못 넘기던 것들이, 오늘 상 위에 전부 올라와 있었다.

목이 조금 뜨거워졌다. 서도혁은 상실에 약한 놈이었지만, 이런 종류의 챙김에는 더 약했다. 아무도 "고생했다"는 말을 안 했다. 대신 반우진이 그 말을 밥으로 했다. 본인도 모르게.

베인"…우진 씨."

러스트"네."

베인"…잘 먹을게요."

평소의 시비도, 냉소도 없는 목소리였다. 반우진은 그 말에 담긴 걸 다 알아들었으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온화하게 웃었다.

러스트"많이 드세요. 오늘따라 밥이 많네요."

다섯이 열 명분을 다 먹었다. 대식가가 둘이나 있는 팀이라 사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아무도 왜 밥이 많았는지 더 묻지 않았고, 서도혁은 복귀한 그날 저녁,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그게 이 팀이 "돌아와서 다행이다"라고 말하는 방식이었다. 밥으로, 티 안 나게, 본인도 모르게.

— 정직 편 끝 —

단편 17가라앉는 날

각성자에겐 가라앉는 날이 있다.

에코가 몸에 차오르면 그렇게 된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리고, 형광등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고, 별것 아닌 일에 날이 선다. 침식의 초입. 센티넬이라면 누구나 아는 신호였다. 방치하면 에코가 역류하고, 그다음은 아무도 입에 담지 않는 단계로 이어진다.

그래서 가이딩이 있었다. 가이드의 에코로 제 에코를 공명시켜 가라앉히는 것. 접촉이 깊을수록 효율이 올랐고, 그래서 대개는 살을 맞댔다. 하지만 이 팀엔, 살을 맞댈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서도혁은 그날 오후 뮤즈팀에 다녀왔다.

배정된 가이드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서도혁은 늘 그랬듯, 손끝만 내줬다. 최소 접촉. 딱 침식을 눌러앉힐 만큼만. 그 이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가이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뮤즈"…이 정도로는 절반밖에 안 잡혀요. 손목까지만 허락해주시면—"

베인"이거면 됩니다."

손끝만으로는 에코가 절반밖에 안 내려간다. 나머지 절반은 그냥 안고 버티는 거였다. 그래도 서도혁은 손목조차 내주지 않았다. 낯선 사람에게 제 안을 여는 건, 그가 몇 달째 못 하는 일이었다. 잃은 지 아직 반년도 안 됐으니까.

세션이 끝나고 돌아온 서도혁은 조용했다. 침식은 눌렸는데, 표정은 더 가라앉아 있었다.

가이딩은 원래 그런 거였다. 남의 에코가 제 안에 들어왔다 빠져나가면, 그 자리가 허전해진다. 하물며 마음도 안 준 낯선 사람이라면. 서도혁에게 가이딩은 위안이 아니라, 매번 같은 걸 확인하는 절차 같았다. 자긴 아직도 아무도 안으로 못 들인다는 것.

모비딕"괜찮냐."

베인"…에코는 잡혔어요."

모비딕"그거 물어본 거 아니야."

베인"…알아요."

호세는 더 캐묻지 않았다. 서도혁은 대답 대신 방으로 들어갔다. 이 팀엔 그런 걸 안 캐묻는 예의가 있었다.


케일럽은 뮤즈팀에 아예 가지 않았다.

그는 가이딩을 안 받았다. 이유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팀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조용한 규칙 중 하나였으니까 — 케일럽 에반스에게 가이드 얘기는 꺼내지 않는다. 그의 과거 어딘가에,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자리가 하나 있었다.

대신 그는 약을 삼켰다. 억제제. 에코 출력 자체를 낮춰 침식을 늦추는 약이었다. 가이딩이 에코를 가라앉히는 거라면, 약은 에코를 틀어막는 거였다.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라, 그냥 미루는 것. 그리고 미룬 건 언젠가 돌아온다.

반우진이 그 손을 봤다. 장갑 낀 손이 아니라, 눈으로. 그 실눈은 늘 다 봤다.

러스트"케일럽 군. 그거, 지난달보다 자주 드시는 것 같은데요."

트러블"기분 탓이에요."

러스트"…제가 병원에 오래 있었어요. 그 약, 오래 먹으면 안 들어요. 몸이 익어버려서."

트러블"그럼 어떡하라고요."

케일럽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날이 섰다. 반우진은 잠깐 그를 봤다가, 더 말하지 않았다.

가이딩을 받으라는 말은, 반우진도 끝내 꺼내지 못했다. 케일럽에게 그건 건드리면 안 되는 자리였고, 반우진은 그걸 아는 사람이었다. 대신 그는 약통 옆에 물 한 잔을 조용히 놓아두고 물러났다. 그게 그가 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그게 이 팀의 방식이었으니까. 묻지 않고, 강요하지 않고, 그냥 곁에 두는 것.


그날 밤, 케일럽은 자기 방에서 약을 한 알 더 삼켰다.

원래는 두 알이면 됐다. 이번 달부턴 세 알이었다. 반우진 말이 맞았다. 몸이 약에 익어가고 있었다. 관자놀이의 통증은 세 알을 먹어도 완전히 가시지 않았고, 그는 그걸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거울 속 자기 눈을 봤다. 잠깐, 아주 잠깐, 늘 옅은 금빛이 돌던 자리에 낯선 검보랏빛이 비쳤다가 사라졌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색이었다. 케일럽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다시 봤을 땐, 평범한 눈이었다.

트러블"…아직 괜찮아."

아무도 없는 방에서, 케일럽은 혼자 그렇게 중얼거렸다. 누구를 안심시키려는 말인지는 본인도 몰랐다.


가이딩을 안 받는 센티넬은 두 종류다. 아직 버틸 만한 사람, 그리고 이미 늦은 걸 인정하기 싫은 사람. 케일럽은 자기가 전자라고 믿었다.

팀은 아무도 몰랐다. 아니, 반우진만 어렴풋이 알았고, 케일럽이 먼저 말하지 않는 한 꺼내지 않기로 했다. 묻지 않고 그냥 옆에 있는 것 — 그게 이 팀이 서로를 지켜온 방식이었다.

다만 이번만은, 그 방식이 옳은 건지 아무도 확신하지 못했다.

— 다음 단편에 계속 —

단편 18닻

테미스의 예고는 틀렸다.

상급 이형 하나. 그게 브리핑이었다. 올림피안 다섯이면 넘치는 규모였다. 그런데 폐공단의 균열이 열렸을 때, 거기서 기어 나온 건 하나가 아니었다. 상급 여럿에, 그것들을 부리는 무언가가 더 깊은 곳에 있었다. 예고에 없던 격의 존재였다.

테미스가 숫자를 틀린 대가는, 언제나 현장이 치른다.


싸움은 처음부터 밀렸다.

다섯 다 며칠째 침식이 한계였다. 가이딩도, 약도, 이 숫자 앞에선 아무 의미가 없었다. 폐공단은 메말라 있었고, 물이 없는 곳에서 베인의 수압검은 절반의 위력도 못 냈다.

베인이 먼저 쓰러졌다. 에코를 쥐어짜다 침식이 역류했고, 케일럽이 그를 끌고 물러나다 뒤를 내줬다. 둘 다 혼수. 숨은 붙어 있었지만, 그게 다였다.

남은 셋이 둘을 끌고 폐건물 안으로 숨어들었다. 밖에선 이형들이 건물을 하나씩 훑고 있었다. 시간문제였다.


데이비드 하트가 상황을 셌다. 그는 늘 세는 사람이었다.

케일럽과 베인은 혼수. 반우진은 능력을 너무 써 손끝이 이미 노인의 것처럼 늙어 있었다. 자신도 한계였다. 통신은 두절. 구조는 오지 않는다. 이대로면 다섯 다 여기서 끝이었다.

그때, 호세가 일어섰다.

다섯 중 유일하게 아직 온전히 서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혼수 상태의 케일럽과 베인을 잠깐 내려다봤다. 자기 고통엔 둔한 남자였지만, 남의 고통엔 개처럼 밝았다. 그리고 지금, 그의 눈앞엔 죽어가는 식구가 넷 있었다.

계산은 이미 끝나 있었다.

뱅가드"페레이라. 앉아. 뭘 하려는지 안다."

모비딕"알면 비켜."

뱅가드"내가 간다. 넌 애들 데리고 빠져."

모비딕"네 꼴을 봐, 데이비드. 너도 지금 침식 한계잖아. 두 발짝도 못 나가."

사실이었다. 데이비드 하트도 이미 한계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호세의 앞을 막아섰다. 규율을, 절차를, 통제를 그토록 신봉하던 남자가. 지금은 오직 한 사람을 잡으려 하고 있었다.

그가 팔을 뻗어 호세를 붙들려는 순간, 몸이 먼저 꺾였다. 며칠째 한계였던 침식이 역류했다. 무릎이 무너지고, 시야가 검붉게 번졌다. 붙잡으려던 손이 허공을 긁었다.

뱅가드"…페레이라. 가지 마. 명령이다."

호세는 주저앉은 팀장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잠깐, 아주 잠깐 웃었다. 이 무뚝뚝한 남자가 좀처럼 짓지 않던 얼굴이었다.

모비딕"애들 잘 부탁한다, 데이비드."

그 말을 끝으로 호세가 몸을 돌렸다. 데이비드가 다시 그의 이름을 부르려 입을 열었다.

뱅가드"페레이—"

말이 끝나기 전에, 호세의 에코가 폐공단 입구를 통째로 틀어막았다. 푸른 물벽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질렀다. 부르는 소리도, 붙잡는 손도, 그 벽을 넘지 못했다. 호세는 일부러 그렇게 했다. 마지막 인사조차, 남겨질 사람들이 더 아프지 않게 잘라낸 거였다.

물벽 너머, 아무도 듣지 못하는 곳에서. 호세는 혼자 낮게 중얼거렸다.

모비딕"…돌아올게, 꼭."

돌아올 방법 같은 건 처음부터 재지 않은 사람이었다. 어떻게 하면 넷을 확실히 빼낼 수 있는지, 그것만 계산했을 뿐이다. 자기 몫의 결말은 진작 계산에서 빼두고서, 그러면서도 마지막엔 아무도 못 들을 거짓말을 남겼다. 남 아프게 하는 걸 못 견디는 사람이라, 못 돌아온다는 사실조차 저 혼자 짊어지고 가려 한 거였다.


물벽 너머, 호세가 이형들을 향해 걸어갔다.

마른 폐공단의 공기에서 물이 솟았다. 배관에서, 땅밑에서, 제 몸속에서. 푸른 에코가 폐허 전체를 뒤덮었다. 무너지는 물벽 틈으로 데이비드 하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 푸른빛 한가운데서 솟아오르는 거대한 고래의 형상이었다. 여태 본 것 중 가장 컸다. 케일럽의 버프도 없이. 하늘을 가릴 만큼.

고래가 폐공단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리고 세상이 온통 물과 푸른빛으로 뒤덮였다.

세상이 온통 물과 푸른빛으로 뒤덮이는 순간에도, 폐건물 안쪽만은 조용했다. 사방을 부수는 물살이 유독 그 자리만 비껴갔다. 케일럽과 베인이 누운 곳, 데이비드와 반우진이 웅크린 곳. 넘쳐흐르는 힘 한가운데서, 딱 그 한 구획만 물벽이 둥글게 감싸 지켜내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호세의 에코는 제 식구들이 있는 쪽을 향하지 않았다. 부술 것과 지킬 것을 그 아수라 속에서도 정확히 갈라둔 거였다.

데이비드 하트는 그 물벽 안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와 물이 모든 걸 삼키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밖을 보지 않았다. 보면, 갈 수 없었으니까.


구조대가 도착했을 때, 폐공단엔 아무것도 없었다.

이형도, 물도, 호세도. 균열은 닫혔고, 부팀장은 사라졌다. 그 거대한 고래가 무엇을 삼키고 어디로 갔는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벽 안에 갇힌 넷은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끝내 보지 못했으니까.

수색은 사흘간 이어졌다. 시신은 없었다. 에코 반응조차 없었다. 호세 페레이라는 전사(戰死)가 아니라 실종(失踪)으로 처리됐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무엇이 되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만 "금방 올게"라던 그는, 그날 이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저녁, 숙소 식탁엔 아무도 앉지 않았다.

반우진은 습관처럼 접시를 세다가, 손을 멈췄다. 다섯이 아니었다. 케일럽과 베인은 아직 의무실에서 깨어나지 못했고, 데이비드는 보고서 앞에서 밤을 새웠고, 호세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케일럽 에반스가 의무실에서 깨어나, 호세가 자기를 살리고 사라졌다는 걸 들었을 때. 그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는 아무도 오래 보지 못했다. 다들 차마 볼 수가 없어서.

데이비드 하트는 그날 밤 보고서를 쓰다 몇 번이나 손을 멈췄다. 이라크에서 편대를 잃고, 다시는 사람을 두고 오지 않겠다 맹세했었다. 그런데 이번엔 다리가 꺾여 붙잡지도 못했다. 살아 돌아온 자의 자리는, 두 번째라고 해서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이날로, 다섯은 넷이 되었다. 그리고 팀은,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직 바다였던 계절은, 그렇게 끝났다.

— 다음 단편에 계속 —

단편 19넷이 된 집

케일럽은 사흘 만에 깨어났고, 베인은 나흘 만에 깨어났다.

둘 다 깨어나자마자 물은 게 같았다. 호세는. 그리고 둘 다, 대답을 듣고 나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퇴원한 날 저녁, 넷은 오랜만에 숙소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 익숙한 거실이 있었다. 소파도, 게임기도, 냉장고에 붙은 규칙판도 그대로였다. 아무것도 바뀐 게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달라진 건 소리였다.

예전 이 집엔 늘 소리가 넘쳤다. 케일럽과 베인이 냉장고 앞에서 싸우는 소리, 뱅가드가 규칙 몇 조를 읊는 소리, 반우진이 밥 푸는 소리, 그리고 그 소란 위로 무심하게 밥을 두 그릇씩 비우던 거구 하나.

이제 집은 조용했다.

베인은 더 이상 냉장고에 이름을 써 붙이지 않았다. 써 붙일 이유가 없었다. 그의 푸딩을 몰래 먹던 사람이 하나 줄었으니까 — 정확히는, 케일럽이 더 이상 그걸 훔쳐 먹으며 싸움을 걸지 않았으니까. 둘은 여전히 티격태격했지만, 어딘가 힘이 빠져 있었다. 싸우다가도 문득, 이 소란을 지켜보며 픽 웃어주던 사람이 없다는 걸 동시에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반우진은 여전히 밥을 지었다.

다만 이제, 밥이 자꾸 남았다. 손이 아직도 다섯 명분을 펐다. 냄비를 올리다가, 접시를 세다가, 몇 번이나 멈칫했다. 머리는 알아도 손이 아직 몰랐다. 남은 밥을 볼 때마다 넷은 아무 말 없이 그릇을 비웠다. 누구도 "밥이 많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 말을 꺼내면, 왜 많은지도 말해야 했으니까.

어느 날 저녁, 반우진이 조용히 밥솥 앞에 서서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케일럽이 다가가 보니, 그는 딱 네 공기만큼만 쌀을 씻고 있었다. 손이 드디어 넷을 배운 거였다. 반우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케일럽은 그 뒷모습을 오래 보지 못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데이비드 하트는 더 엄격해졌다.

훈련 강도를 올렸고, 규정을 한 자도 봐주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호세가 뒤에서 "애를 그렇게 잡냐"고 따졌을 텐데, 이제 그 목소리가 없었다. 아무도 팀장에게 브레이크를 걸지 않았다. 데이비드는 그게 편해서가 아니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또 누굴 잃을 것 같아서 규정에 매달렸다. 호세를 못 막은 다리가, 아직도 그를 벼랑 끝에 세워두고 있었다.

규칙판엔 조항이 하나도 늘지 않았다. 늘 사고를 쳐서 규칙을 만들게 하던 사람들이, 이제 사고 칠 기운도 없었으니까.


가장 달라진 건 케일럽이었다.

호세가 자기를 살리고 사라졌다는 사실은, 케일럽 안에서 조용히 곪았다. 그는 더 이상 혼나고 옥상에 올라가지 않았다. 옥상엔 호빵을 사들고 올라와줄 사람이 없었으니까. 대신 그는 약을 한 알씩 더 삼켰다. 관자놀이의 통증은 나아지지 않았고, 거울 속 눈에 낯선 색이 스치는 빈도는 조금씩 잦아졌다. 그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이 팀은 서로에게 묻지 않는 걸 예의로 알았다. 티 내지 않고, 그냥 옆에 있는 것. 그게 지금껏 이들이 서로를 사랑해온 방식이었다.

하지만 호세가 사라진 뒤, 그 방식엔 구멍이 하나 생겼다. 옆에 있어주던 사람이 하나 줄었다는 것. 그리고 남은 넷은 아직, 그 구멍을 어떻게 메워야 할지 몰랐다.


그날 밤, 반우진은 오랜만에 다섯 명분을 다시 지었다.

실수는 아니었다. 그는 네 공기를 식탁에 놓고, 다섯 번째 공기를 호세가 늘 앉던 자리에 조용히 올려두었다. 아무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넷은 그 빈자리 앞에서 말없이 밥을 먹었다.

그게 이 팀이 호세를 기다리는 방식이었다. 돌아온다고, 아무도 믿지 않으면서. 그래도 한 공기를, 매일 저녁 그 자리에.

— 다음 단편에 계속 —

단편 20오발

처음 능력이 어긋난 건 훈련장에서였다.

케일럽이 베인에게 강화 탄환을 쐈다. 늘 하던 거였다. 승리의 에코를 실어 아군의 다음 일격을 배로 키우는 것. 니케의 격. 그가 3년간 눈 감고도 하던 일이었다.

그런데 탄환이 베인의 등에 박히는 순간, 베인이 검을 놓쳤다.

베인"…뭐야 방금."

트러블"강화 넣었는데."

베인"강화? 야, 나 방금 온몸에 힘 빠졌어. 손끝까지."

케일럽은 아무 말도 못 했다. 분명 강화를 실었다. 그런데 베인은 강해진 게 아니라, 순간적으로 무력해졌다. 능력이 정반대로 나간 거였다.

그날은 그냥 컨디션 탓으로 넘겼다. 다들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오발은 계속됐다.

어떤 날은 제대로 강화가 됐고, 어떤 날은 아무 일도 없었고, 또 어떤 날은 아군의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케일럽 자신도 어느 쪽이 나갈지 알 수 없었다.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도박이 됐다. 승리의 여신은, 조금씩 다른 무언가로 변해가고 있었다.

케일럽은 팀에게 자기한테 강화를 받지 말라고 했다. 이유는 대충 둘러댔다. 손목이 안 좋다고, 슬럼프라고. 아무도 곧이듣지 않았지만, 아무도 캐묻지 않았다. 그게 이 팀의 방식이었으니까.

다만 이번엔, 그 방식이 케일럽을 점점 더 혼자로 만들었다.


예민함도 달라졌다.

케일럽은 원래 화를 잘 냈다. 하지만 그건 시끄러운 화였다. 욕하고, 소리치고, 물총을 꺼내들다 뱅가드한테 압수당하는. 살아 있는 화였다.

지금의 예민함은 다른 결이었다. 소리가 없었다. 형광등이 깜빡이는 게 못 견디게 거슬렸고, 누가 뒤에서 다가오면 반사적으로 손이 총으로 갔다. 베인이 평소처럼 시비를 걸어도, 예전처럼 이죽거리며 받아치는 대신 눈에 핏발부터 섰다. 별것 아닌 말에 살기가 돌았다가, 스스로 놀라 입을 다물었다.

베인"…야."

트러블"…뭐."

베인"너 방금 나 죽일 뻔한 눈이었어."

트러블"…아니야."

베인"…그래. 아니겠지."

베인은 더 긁지 않았다. 3~4년 전, 자기 결속 파트너가 무너져가던 걸 지켜봤던 사람이었다. 그 결이 어떤 건지, 베인은 알았다. 알아서, 아무 말도 못 했다.


결국 사고가 났다.

중급 이형 소탕 임무 중이었다. 별것 아닌 규모였다. 뱅가드가 앞에서 이형을 밀어붙이고, 케일럽이 후방에서 엄호하는 익숙한 배치. 케일럽이 뱅가드를 강화하려 방아쇠를 당겼다.

탄환은 뱅가드의 어깨에 박혔고, 뱅가드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온몸의 힘이 빠지는 무력화. 강화가 아니라, 공포와 무력감을 심는 탄환. 니케가 아니라,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무언가의 탄환.

엄호받아야 할 팀장이, 아군의 오발에 그대로 노출됐다. 이형의 발톱이 뱅가드의 옆구리를 긋고 지나갔다. 반우진이 달려들지 않았으면 더 깊었을 상처였다.

임무는 어떻게든 끝났다. 돌아오는 차 안은, 그날 유독 조용했다.

트러블"…팀장. 미안."

뱅가드"……"

트러블"손이 미끄러졌어. 다신 안 그럴게."

데이비드 하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화가 나서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저건 손이 미끄러진 게 아니라는 걸. 통제를 벗어난 각성자가 어떻게 되는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얼마 전, 바로 그 눈으로 한 명을 떠나보냈으니까.

그리고 이번엔, 그걸 못 본 척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날 밤, 데이비드 하트는 오래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책상엔 두 장의 서류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케일럽 에반스의 정밀 침식 검사 요청서. 다른 하나는, 차마 손대지 못한 채 뒤집어둔 한 장.

제로. 폭주한 센티넬을 긴급 진압하고, 전락자를 무력화하는 특수팀. 검사 결과가 나쁘게 나오면, 케일럽의 이름은 그 팀의 명단으로 넘어갈 수도 있었다.

데이비드 하트는 그 서류를 뒤집어둔 채, 밤새 손대지 않았다. 규정대로라면 지금 올려야 하는 서류였다. 하지만 그는 이번만은, 규정보다 반 박자 늦기로 했다.

한 명은 이미 못 지켰다. 두 번째까지는, 아직 포기할 수 없었다.

— 다음 단편에 계속 —

단편 21떠나는 밤

케일럽은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거울 속 눈에서 금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승리의 여신이 돌던 자리를, 낯선 검보랏빛이 조금씩 덮었다. 처음엔 스치듯 지나가던 색이, 이제는 좀처럼 빠지지 않았다. 약을 세 알 먹어도, 네 알을 먹어도. 니케는 저물어가고 있었고, 그 자리에 무엇이 오는지 케일럽은 이제 알았다.

침식이 아니었다. 그건 진작 지났다. 균열도 지났다. 그가 서 있는 곳은 그다음이었다. 며칠일지 몇 시간일지 모를, 마지막 문턱.

전락. 되돌릴 수 없는 것. 에코가 인격을 완전히 덮어쓰는 것.


케일럽이 가장 두려운 건 죽음이 아니었다.

전락자는 사살 대상이었다. 자아를 잃은 각성자는 이형과 다를 바 없다고, 테미스는 그렇게 규정했다. 그리고 그 사살을 집행하는 건 제로였다. 만약 케일럽이 숙소에서, 훈련장에서, 팀원들 눈앞에서 무너진다면 — 그를 쏘는 손은 반우진일 수도, 베인일 수도, 데이비드일 수도 있었다.

케일럽은 그 그림을 견딜 수 없었다. 자기가 무너지는 것보다, 자기 때문에 식구 중 누군가가 방아쇠를 당겨야 하는 것이. 호세가 자기를 살리고 사라진 마당에, 이번엔 자기가 남은 넷에게 그런 짐을 지운다는 것이.

그래서 그는 정했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으로 가기로. 여기서 무너지지 않기로. 남은 사람들 눈에, 마지막까지 케일럽 에반스로 남기로. 그다음 자기 몫의 끝은, 아무도 모르는 데서 혼자 감당하기로.

호세가 물벽으로 마지막 인사를 잘라냈던 것처럼. 케일럽도, 자기 방식으로 그러기로 했다.


늦은 새벽, 케일럽은 짐도 없이 숙소를 나섰다.

돌아오지 않을 사람에게 짐은 필요 없었다. 현관을 지나며, 그는 잠깐 식탁을 봤다. 호세의 자리에 놓인 밥 한 공기. 반우진이 매일 저녁 올려두는 것. 케일럽은 그 앞에서 잠깐 멈췄다가, 이내 문을 밀었다.

차가운 새벽 공기 속으로 몇 걸음. 그리고 등 뒤에서 목소리가 났다.

베인"어디 가."

서도혁이었다. 잠옷 위에 코트만 걸친 채, 맨발에 가까운 차림으로. 오래 기다린 사람의 얼굴이었다. 어쩌면 며칠 전부터, 케일럽이 이럴 걸 알고 밤마다 깨어 있었는지도 몰랐다.

트러블"…바람 쐬러."

베인"짐도 없이, 이 새벽에, 그 눈으로?"

케일럽은 대답하지 못했다. 베인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 눈이 무슨 색인지, 이 밤이 무슨 밤인지.


베인은 조롱으로 말하는 사람이었다. 진심은 짧게 끊어 치고, 웬만해선 속을 안 보였다. 그런 그가 지금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케일럽의 앞을 막고 선 채, 하려는 말을 몇 번이나 삼켰다.

긴 침묵 끝에, 겨우 한 마디가 나왔다.

베인"…가지 마."

처음이었다. 서도혁이 누군가에게 냉소 하나 없이 그렇게 말한 건. 결속 파트너를 잃은 뒤로 그는 누구도 붙잡지 않았다. 붙잡았다가 또 잃는 게 무서워서. 그런 그가 지금, 몇 달 만에 다시 손을 뻗고 있었다.

케일럽은 그 손을 뿌리치듯 눈을 돌렸다.

트러블"좋게 말할 때 비켜, 서도혁."

베인"싫어."

트러블"…경고했다."


케일럽의 손끝에 검보랏빛이 어렸다. 누르려 해도 새어 나오는 에코. 그를 막아선 사람에게 향할까 봐, 케일럽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눌리지 않았다.

서도혁의 손에도 물기가 어렸다. 수압을 응축하는 신호. 그의 눈빛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베인"그럼 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끌고가야지."

검보랏빛과 푸른빛이 새벽 어둠 속에서 마주 섰다. 한때 균열 속에서 두 마디로 상급 이형을 잡던 최고의 콤비가, 지금은 서로를 향해 에코를 세우고 있었다.

한 발짝만 더 가면, 정말로 서로를 다치게 한다. 둘 다 알았다. 그리고 둘 다,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 다음 단편에 계속 —

단편 22마지막 합

먼저 움직인 건 케일럽이었다.

베인을 비켜 지나가려고. 하지만 서도혁이 물살로 그 앞을 막았다. 케일럽이 탄환을 쏘면, 서도혁은 이미 그 각도를 알고 몸을 틀었다. 서도혁이 파고들면, 케일럽은 그가 어디로 들어올지 알고 물러섰다.

둘은 서로를 너무 잘 알았다.

3년을 매일 싸운 놈들이었다. 냉장고 앞에서, 게임기 앞에서, 균열 속에서. 케일럽은 서도혁의 검이 어느 박자에 터지는지 알았고, 서도혁은 케일럽이 재장전에 몇 초가 비는지 알았다. 한때 그 앎으로 서로의 등을 지켰다. 지금은 그 앎으로, 서로의 결정타를 전부 읽어냈다.

그래서 결판이 나지 않았다.


물살이 벽을 부수고, 탄환이 콘크리트를 파냈다. 새벽 공터가 순식간에 엉망이 됐다.

케일럽은 이기려고 싸우는 게 아니었다. 지나가려고 싸웠다. 서도혁은 이기려고 싸우는 게 아니었다. 붙잡으려고 싸웠다. 목적이 다른 두 사람이, 같은 실력으로 부딪히니 끝이 없었다.

하지만 케일럽에겐 시간이 없었다. 방아쇠를 당길수록 검보랏빛 에코가 더 새어 나왔고, 손이 떨렸고, 시야가 흐려졌다. 안에서 무언가가 자꾸 고개를 들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무너지면, 서도혁 눈앞에서 전락하면 — 그가 가장 두려워하던 바로 그 그림이었다.

케일럽은 서둘렀다. 서두르다 처음으로, 손이 미끄러졌다.

아니, 미끄러진 게 아니었다. 통제를 벗어난 에코가, 제멋대로 방아쇠를 앞당겼다.


탄환이 서도혁의 어깨를 관통했다.

검보랏빛이 상처를 타고 번졌다. 공포와 무력감을 심는 에코. 서도혁의 다리가 풀리고, 검이 손에서 떨어졌다. 그가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케일럽이 얼어붙었다.

총구에서 아직 검보랏빛 연기가 올랐다. 방금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케일럽은 그제서야 봤다. 강화하려던 손이, 아군을 쐈다. 오발이 아니라, 관통이었다. 언제나 두려워하던 일이 결국 일어난 거였다. 자기가 식구를 다치게 하는 것.

트러블"…서도혁."

목소리가 떨렸다. 케일럽이 반사적으로 한 걸음 다가서려 했다.

그 순간, 무릎 꿇은 서도혁이 성한 손을 뻗어 케일럽의 발목을 붙잡았다. 피 흐르는 어깨로, 목소리를 쥐어짰다.

베인"가지 말라고, 이 개새끼야!"

이번엔 경고도, 조롱도 아니었다. 피를 토하는 고함이었다.

베인"나 봐, 씨발. 이래도 안 무너졌잖아. 너 아직 케일럽이야. 어? 아직 멀쩡하다고. 그러니까 가지 마, 이 새끼야. 가지 말라고—"

목소리가 갈라졌다. 누구도 안 붙잡던 사람이, 자길 쏜 사람에게 악을 쓰고 있었다.


케일럽은 그 손을 내려다봤다.

발목을 붙든 서도혁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 손을 뿌리치는 게, 방금 그를 쏜 것보다 더 힘들었다.

하지만 케일럽은 알았다. 여기 남으면, 다음엔 어깨가 아닐 거라는 걸. 오늘은 서도혁이었고, 내일은 반우진일 수도, 데이비드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엔 — 자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난 자리에서, 남은 셋이 서로를 붙들고 울어야 할 거라는 걸.

방금 자기가 서도혁을 쏜 이 순간이, 그 증거였다. 자긴 이미 늦었다. 붙잡히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케일럽은 천천히, 서도혁의 손을 발목에서 떼어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시는 못 만질 사람을 만지듯이.

트러블"…미안."

그게 다였다. 케일럽은 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서도혁을 더 아프게 할 뿐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그는 등을 돌렸다. 뒤에서 서도혁이 성치 않은 몸으로 기어서라도 따라오려는 소리가, 다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케일럽은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갈 수 없었으니까.

호세가 그랬던 것처럼.


새벽 어둠 속으로, 케일럽 에반스가 걸어 들어갔다.

등 뒤로 서도혁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그 목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됐을 때, 케일럽은 딱 한 번, 소리 없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이날로, 넷은 셋이 되었다.

올림피안의 마지막 계절은, 그렇게 끝났다.

— 다음 이야기에 계속 —

종 장압주, 어느 오후

현실과 균열 사이 어딘가, 아래로 갈수록 폐허가 깊어지는 도시. 압주.

그 한구석, 알렉토의 낡은 아지트에서, 호세는 소파에 파묻혀 잠들어 있었다.

낮이었다. 창 대신 뚫린 틈으로 뿌연 빛이 들었다. 흔한 일은 아니었다. 이 도시에 온 뒤로 그는 좀처럼 낮에 눈을 붙이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바람인지 소파에 앉아 있다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발소리에 눈이 떠졌다.

트러블"모비딕이 웬일로 낮잠이야."

케일럽이 문가에 기대 서 있었다. 검보랏빛이 눈가에 옅게 도는, 그러나 아직 저인 채로 남은 얼굴로.

호세는 몸을 일으켜 목을 한 번 돌렸다.

모비딕"…글쎄. 좀 피곤했나 보지."

트러블"당신이 피곤한 것도 다 있고."

모비딕"…그러게."

호세는 더 말하지 않았다. 잠들기 직전까지 눈앞에 선명하던 것들 — 냉장고에 붙은 이름표, 새벽 부엌의 라면 냄새, 옥상의 캔커피 같은 것들이 아직 손끝에 남아 있었다. 이제는 아무도 그 자리에 없는 것들이었다. 그는 그걸 얼버무리고 넘겼다. 케일럽도 굳이 캐묻지 않았다.

둘은 잠깐 그렇게, 뿌연 빛 속에 말없이 있었다.

호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비딕"…나가자. 순찰 시간이다."

케일럽이 먼저 문을 나섰고, 호세가 그 뒤를 따랐다. 압주의 뿌연 오후가, 두 사람을 조용히 삼켰다.

「아직, 바다였을 때」 · 完

리멤버 과거 외전

Do You
Remember?

기억을 지우는 에코를 가진 가이드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잊었는지도 잊었다.

단편 01관찰 대상 THM-████

문서 등급: 3급 기밀 · 열람 제한
테미스 특수물성연구부 제█연구실
관찰 대상: THM-████ / 남 / 추정 연령 █세
계보: 타르타로스 · 레테 (에코 특성: 망각)
기록: 담당 관찰관 ██████


기록 1

대상 THM-████ 인수. 아동. 확보 경위는 ██████████████████████ 관련하여 상부 문서 참조. 신체·정서 발달상 특이소견 없음.

대상은 조용하다. 매우 조용하다. 인수 첫날부터 큰 소리를 낸 적이 없다. 낯선 환경, 낯선 성인들, 낯선 시설. 이 나이대 아동에게서 예상되는 울음이나 저항이 관찰되지 않는다. 대상은 그저 방 한구석에 앉아,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눈으로만 따라간다.

기록 3

대상은 지시에 순응한다. 앉으라면 앉고, 따라오라면 따라온다. 반항이나 질문이 없다. 식사는 남기지 않고 다 먹으나, 특별히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기색은 표현하지 않는다.

배정된 방에 아동용 물품이 몇 점 비치되어 있으나 손대지 않는다. 대신 대상은 창을 좋아하는 것으로 보인다. 채광 시간이면 창가에 붙어 앉아 밖을 오래 본다. 무엇을 보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기록 6

대상의 하루 일과는 극히 규칙적이다. 기상, 식사, 관찰, 세션, 취침. 이 순서가 흐트러지면 대상은 불안한 기색을 보인다. 예정에 없던 인원이 방에 들어오면, 대상은 하던 것을 멈추고 벽 쪽으로 물러난다. 위협 행동은 없다. 그저 조용히 물러나, 상황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담당 영양사에 따르면, 대상이 처음으로 무언가를 요청했다고 한다. 따뜻한 물. 그게 전부였다. 요청이라기보다, 아주 작게 물어본 것에 가까웠다고 함.


기록 9

추출 세션 관련 관찰. 대상은 세션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은 분명하다.

세션이 있는 날이면, 대상은 아침 식사를 평소보다 천천히 먹고, 일과 내내 방 구석으로 물러나 무릎을 안고 앉는다. 세션 직전에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관찰된다. 그러나 거부하거나 저항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호명하면 일어서고, 팔을 내밀라면 내민다. 세션이 끝나면 다시 구석으로 돌아가 벽을 본다.

이 나이대 아동에게서 관찰되는 전형적 반응(울음, 발버둥, 회피)이 전무하다. 대상이 왜 이 정도로 순응적인지에 대해서는 ████████████████████████.

기록 12

특이사항이라 하기는 어려우나 기록한다. 오늘 세션 후, 담당 관찰관이 대상의 방을 지나다 보니, 대상이 무릎에 이마를 대고 앉아 있었다. 우는 것은 아니었다. 소리도 움직임도 없었다. 잠시 지켜보았으나, 대상은 그 자세로 오래 있었다.

규정상 정서적 개입은 금지되어 있다. 관찰관은 문 앞에서 물러났다.

기록 15

대상이 오늘 처음으로 관찰관에게 말을 걸었다. 세션 대기 중이었다. 대상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거 언제 끝나요?" 세션을 말하는 것인지, 이 생활 전체를 말하는 것인지는 불분명했다. 규정상 대답하지 않았다.

대상은 더 묻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조용해졌다. 마치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던 것처럼.


기록 ██

대상은 여전히 조용하고, 여전히 순응적이며, 관리상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담당 관찰관으로서 소견을 기록한다. 본 대상은 실험 목적에 부합하는 이상적 개체이다.

████████████████████████████████████
████ [담당관 개인 소견 — 열람 권한 없음] ████
████████████████████████████████████

다음 관찰 기록은 세션 강도 조정 이후 재개한다.

— 다음 단편에 계속 —

단편 02정서적 개입 금지

관찰 지침 3.2조. 관찰관은 대상과 정서적 유대를 형성해서는 안 된다. 대상은 관찰 대상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기록 ██

대상은 세션이 끝나면 항상 따뜻한 물을 찾는다. 담당 영양사가 매번 요청받고 데워 오느라 일과가 지연된다는 보고가 있었다. 효율을 위해, 세션 종료 시각에 맞춰 미리 따뜻한 물을 비치해두기로 한다. 관리상의 조치이며, 정서적 개입에 해당하지 않는다.

대상은 물이 미리 준비되어 있는 것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관찰관 쪽을 한 번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관찰관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록 ██

대상이 창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기록 3에 이미 남겼다. 채광 시간이 짧아 대상이 창가에 머무는 시간이 제한적이라는 점을 관찰했다. 일과표상 대상의 자유 시간을 채광 시간대로 조정하였다. 대상의 정서 안정이 관찰 데이터의 질을 높인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며, 그 외의 의도는 없다.

대상은 늘어난 창가 시간 동안, 이전보다 어깨의 긴장이 풀린 자세를 보인다. 데이터로서 유의미하다.

기록 ██

오늘 세션 대기 중, 대상이 두 번째로 관찰관에게 말을 걸었다. "아저씨는 여기 왜 있어요?" 규정상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으나, 이번엔 대답했다. "너를 보러." 부적절한 응답이었음을 인지한다.

대상은 잠깐 눈을 깜빡이더니, 아주 작게 물었다. "매일요?" 관찰관은 "매일"이라고 답했다. 대상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러나 그날 대상은, 세션 내내 관찰관 쪽을 몇 번 돌아보았다. 확인하는 것 같았다. 아직 거기 있는지를.


기록 ██

진전 사항. 대상이 오늘 처음으로 자발적 발화를 두 문장 이상 이어갔다.

창가에서, 대상이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새는 매일 저 시간에 와요." 관찰관이 언제부터 봤냐고 묻자, 대상은 "아저씨 오기 전부터"라고 답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이름 지어줬는데. 말해도 돼요?" 관찰관은 규정을 어기고, 말해도 된다고 했다.

대상이 지어준 새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는다. 그것은 데이터가 아니라, 대상이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나눠준 것이기 때문이다. 규정 위반임을 안다. 그러나 그 이름은, 관찰 기록이 아니라 다른 곳에 남겨두기로 한다.

기록 ██

대상은 이제 세션이 끝나면 관찰관을 먼저 찾는다. 눈으로. 관찰관이 그 자리에 있으면, 대상의 표정이 미세하게 풀린다. 없으면, 대상은 물도 마시지 않고 구석으로 돌아가 벽을 본다.

담당 관찰관으로서, 나는 이 관계가 지침 3.2조에 저촉된다는 것을 안다. 보고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나는 오늘도 세션 시각에 맞춰 그 자리에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
██ [담당관 개인 소견 — 상부 검토 대상] ██
████████████████████████████████████

기록 ██

오늘 대상이 처음으로 웃었다.

창가의 새가 유리에 부딪힐 뻔하다 방향을 튼 것을 보고였다. 아주 짧은 웃음이었다. 소리도 거의 나지 않았다. 그러나 웃음이었다. 인수 이래 처음이었다.

관찰관으로서 이 사건이 갖는 데이터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

인간으로서 이 사건이 갖는 의미는, 기록하지 않는다.

— 다음 단편에 계속 —

단편 03어느 관찰관의 일기

※ 아래 기록은 무단이탈로 처리된 관찰관 ██████의 숙소에서 발견되었다. 개인적으로 작성된 노트로 보이며, 작성자의 현재 소재는 확인되지 않는다.


오늘 그 애의 이름을 알아버렸다. 알고 싶지 않았는데.

서류상 그 애는 THM-████다. 번호다. 우리는 아이를 번호로 부르고, 번호로 기록하고, 번호로 관리한다. 이름을 알려고 해서도 안 되고, 알아도 불러선 안 된다. 그게 규정이고, 나는 그 규정이 편했다. 번호는 신경 쓰이지 않으니까.

그런데 오늘 세션 대기 중에, 그 애가 창밖을 보다가 혼잣말처럼 흘렸다. "엄마가 보원이라고 불렀는데." 나는 못 들은 척했다. 안 들었어야 했다. 이제 그 애는 나한테 번호가 아니다. 구보원이다. 젠장.


분명히 해두자. 나는 저 애한테 특별히 잘해주는 게 아니다.

물을 미리 데워두는 건 영양사 동선이 자꾸 꼬여서다. 실제로 세션 지연 보고가 있었고, 미리 비치해두면 그게 준다. 관리 효율의 문제다. 창가 시간을 조정한 것도, 대상이 안정돼야 데이터 편차가 줄기 때문이다. 전부 업무다. 규정 안이다.

나는 그렇게 몇 번을 적었다. 이 노트에까지. 누구 보라고 쓰는 것도 아닌데, 굳이. …그게 좀 웃기긴 한다. 아무도 안 보는 데다가 변명을 쓰고 있으니.


거리를 둬야 한다. 이건 원칙이다.

관찰관이 대상한테 정을 붙이면 데이터가 흔들리고, 판단이 흐려지고, 결국 아무한테도 도움이 안 된다. 나는 그걸 안다. 신입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그래서 나는 선을 긋는다. 딱 관찰만 한다. 그 이상은 안 한다.

그런데 세션 있는 날 아침에 그 애가 밥을 늦게 먹으면, 자꾸 눈이 간다. 손이 떨리는 걸 보면, 못 본 척하기가 어렵다. 세션 끝나고 그 애가 벽 보고 앉아 있으면, 퇴근하고 집에 와서도 그 뒷모습이 생각난다. 오늘도 그랬다. 이게 문제다.

정든 게 아니다. 그냥… 신경이 쓰이는 거다. 자꾸. 그게 뭐가 다르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 아무튼 다르다. 달라야 한다.


오늘 그 애가 물었다. "아저씨는 여기 왜 있어요?"

업무라고 했어야 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너 보러"라고 대답해버렸다. 그 애가 "매일요?" 하고 되물었을 때,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 말았어야 할 대답이었다. 그 애 눈빛이 그 한마디에 조금 달라지는 걸 봤으니까. 나를 믿어도 되는 어른으로 분류하는 눈빛. 그건 위험하다. 나는 그 애를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그 애한테서 뭘 뽑는 쪽에 서 있는 사람이니까.

이제 그 애는 세션이 끝나면 나부터 눈으로 찾는다고 한다. 내가 없으면 물도 안 마신단다. 그 얘길 전해 듣고 하루 종일 기분이 이상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도 모르겠다. 둘 다인 것 같다.


내일부터 좀 거리를 둬야겠다. 물은 영양사한테 넘기고, 대기 시간에 말도 섞지 말고. 관찰관은 관찰만 하면 된다.

…라고 어제도 썼다. 그제도 썼고.

구보원. 그 이름 석 자를 알아버린 게, 아무래도 실수였다.

— 다음 단편에 계속 —

단편 04보원이의 공책

※ 보관 상태 불량. 습기와 훼손으로 상당 부분이 소실되었다. 판독 가능한 부분만 옮긴다. 유실된 글자는 […]로 표기한다.


오늘은 새가 왔다. 어제도 왔다. 이름은 비밀이다. 아저씨한테만 알려줬다.

아저씨는 매일 온다. 나 보러 온다고 했다.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 그래서 좋다.


오늘은 안 아픈 날이다. 안 아픈 날은 창문 보는 날이다. 창문 보는 날이 제일 좋다. […]

내일은 아픈 날인 것 […] 아픈 날은 손이 떨린다. 안 떨려고 하는데 자꾸 떨린다. 그래도 울면 안 된다. 울면 […]


요새 자꾸 까먹는다.

어제 뭐 먹었는지 까먹었다. 그저께 본 사람 얼굴도 까먹었다. 근데 엄마 목소리는 안 까먹었다. 보원아, 하고 부르는 거. 그건 아직 있다. 그거는 절대 안 까먹을 거다. […]

아저씨 이름은 자꾸 까먹어서 마음속으로 여러 번 부른다. 안 까먹으려고. […] 그런데 오늘 또 […]었다. 아저씨한테는 비밀이다. 알면 슬퍼할 […]


[…]

[…] 아저씨가 오늘은 물을 미리 데워놨다. 안 시켰는데. 나는 아저씨가 […] 좋은 사람인 걸 안다. 아저씨는 아니라고 하지만. 얼굴에 다 써있다.

어른들은 나를 번호로 부른다. 근데 아저씨는 한 번도 번호로 안 불렀다. 그냥 "야" 하거나 아무것도 안 부른다. 번호로 안 부르는 게 좋다. 나는 번호가 아니니까. 나는 […]다.


[…이 페이지는 물에 번져 대부분 판독 불가…]

[…] 무서운 […] 그래도 […] 있으면 괜찮다.

[…] 나중에 크면 […] 밖에 나가서 새 진짜로 보고 싶다. 이름 지어준 새 말고 진짜 많은 새. 그때는 아저씨도 […]


[마지막으로 판독 가능한 장]

오늘 뭔가 중요한 걸 까먹은 것 같다. 아침부터 계속 뭔가 빠진 기분이다. 근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다. 까먹은 걸 까먹었다. […]

공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내가 쓴 건데 모르는 얘기가 많다. 새 이름도 여기 안 적어놨다. 왜 안 적었지. 이제 기억이 안 나는데. […]

그래도 여기 이렇게 써있다. 엄마가 나를 보원이라고 불렀다고. 그러니까 나는 보원이다. 공책이 그렇게 말해준다. 잊어버리면, 다시 읽으면 된다. 그러면 되는 거다. […]

※ 이후 장은 전부 백지이거나 소실되었다. 공책의 주인이 이후 무엇을 더 적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 다음 단편에 계속 —

단편 05면담

연구소장은 그날 아침부터 넥타이를 두 번 고쳐 맸다.

카운슬에서 사람이 내려온다는 통보를 받은 뒤였다. 그것도 백윤이. 테미스 설계에 깊이 관여한 프로토게노이의 각인자이자, 센티넬과 가이드 양쪽을 모두 다루는 교육 담당. 이런 지하 연구실까지 직접 발걸음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소장은 그 방문의 의미를 몇 번이나 곱씹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면담실 문이 열렸을 때, 백윤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흰 셔츠에 베스트. 백발을 짧게 친 머리, 순한 눈매에 담긴 황금빛 눈동자. 서른 언저리로밖에 안 보이는 얼굴이었다. 무향 세제의 옅은 잔향이 방 안에 조용히 퍼져 있었다. 그는 소장이 들어오자 부드럽게 웃었다.

백윤"오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앉으세요."

제 방인데도, 소장은 손님처럼 앉게 됐다.


보고는 사무적으로 시작됐다.

소장"THM-████ 건입니다. 추출 출력부터 말씀드리면, 안정적입니다. 인수 이래 출력 곡선에 큰 편차 없이, 계획된 양을 꾸준히 뽑아내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기대 이상입니다."

백윤"그렇군요. 대상이 협조적인가 봅니다."

소장"매우. 저항이 없어 관리 부담이 거의 없습니다."

백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은 여전히 온화했다. 그러나 그 온화함 아래에서 그는 이미 다음 질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안정적이라는 말은, 보고의 서두에나 놓이는 말이라는 걸 그는 알았다. 좋은 소식이 먼저 나오면, 뒤에 나쁜 소식이 따라온다.

백윤"그런데요?"

소장"…부작용이 관찰되고 있습니다."

소장이 서류를 넘겼다.

소장"대상의 망각 에코는 타인의 기억을 소거합니다. 그런데 추출을 반복할수록, 대상 본인의 기억도 함께 손상되는 정황이 확인됐습니다. 자기 능력이 자기를 갉아먹는 구조입니다. 최근 들어 소실 속도가 붙고 있습니다."

백윤"어느 정도인가요."

소장"단기 기억부터 무너지고 있습니다. 주변인 인지, 일과, 최근 사건 순으로. 진행되면… 장기 기억까지 갈 겁니다. 이름이나 출신 같은."

백윤은 잠시 말이 없었다. 서류의 곡선을 눈으로 훑었다. 소장은 그 침묵이 불편했다. 화를 내는 것도, 안타까워하는 것도 아닌, 그저 데이터를 읽는 침묵이었다.


백윤"본론은 그게 아니지요. 실험 자체는요."

소장의 어깨가 조금 굳었다. 가장 하기 싫은 보고였다.

소장"…진전이, 더딥니다."

백윤"더디다."

소장"당초 목표는, 이 망각 에코를 정제해서 결속 상실 기억만 선택적으로 소거하는 기술을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결속 파트너를 잃은 센티넬·가이드의 이탈과 전락을 막기 위해. 각하의 인지조작 능력을, 대상 없이도 재현하는 방향으로요."

백윤"압니다. 제 능력을 대체하겠다는 기획이었으니까요."

백윤의 어조엔 비꼼이 없었다. 그저 사실을 확인하는 말투였다. 그게 소장을 더 위축시켰다.

소장"추출한 에코를 대조군에 적용하면, 기억이 소거되긴 합니다. 하지만 '선택적'이 안 됩니다. 상실 기억만 지우려 해도, 주변 기억이 함께 뭉텅이로 날아갑니다. 정밀도가 나오질 않습니다. 이대로는… 실용화가 어렵습니다."

백윤"대상 본인이 겪는 것과, 똑같은 문제군요."

소장"…예. 그 애도, 지우고 싶지 않은 것까지 같이 잃고 있으니까요."

말해놓고 소장은 아차 싶었다. '그 애'라는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보고서에서는 결코 쓰지 않는 단어. 백윤이 그 단어를 놓쳤을 리 없었다. 다만 그는 아무것도 지적하지 않고, 그저 옅게 웃었다.


백윤은 서류를 덮었다. 그리고 손을 깍지 낀 채,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백윤"소장님. 저 아이를, 한번 만나보고 싶습니다."

소장"…직접 말입니까?"

백윤"예. 숫자로만 보고받아서는, 판단이 서지 않아서요."

소장은 잠깐 망설이다 물었다. 물어도 되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은 채로.

소장"…실험은, 계속됩니까."

백윤은 그 질문을 예상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대답엔 망설임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냉정함도 드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안타까움에 가까운 온기가 어조에 배어 있었다. 그게 이 남자의 가장 서늘한 부분이었다.

백윤"계속됩니다. 다만, 방식은 손을 봐야겠지요. 저 아이가 저렇게까지 망가질 필요는 없으니까요. 추출 강도를 낮추고, 회복 주기를 넣고, 저 아이가 조금이라도 사람답게 지낼 수 있도록. 그건 제가 조정하겠습니다."

소장"…하지만 멈추지는 않으신다는 거군요."

백윤"멈출 수는 없습니다."

그는 창밖을, 정확히는 창이 없는 벽을 잠깐 바라보았다. 마치 그 너머에 있는 무수한 사람들을 헤아리는 것처럼.

백윤"지금 이 순간에도, 결속을 잃고 무너지는 각성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폭주하면, 또 누군가가 죽습니다. 만약 저 아이의 에코로 그 고리를 끊을 수 있다면… 저 아이 하나의 고통으로 수백, 수천을 구할 수 있다면. 저는 그 계산을 외면할 수가 없습니다."

백윤"잔인하지요. 압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계산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몫은, 늘 제가 짊어지기로 했습니다."

소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반박할 수가 없어서였다. 이 남자는 아이를 미워해서 실험을 이어가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아이를 가장 인간적으로 대하려 애쓰면서도, 동시에 그 아이를 계속 갈아 넣기로 결정하고 있었다. 그 두 가지가 한 사람 안에 모순 없이 공존한다는 게, 소장은 소름이 끼쳤다.


백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갈 채비를 하며, 그는 마지막으로 부드럽게 덧붙였다.

백윤"아, 그리고요. 저 아이 담당 관찰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최근 개인 소견이 자꾸 상부 검토에 걸린다더군요."

소장"…예. 조금, 대상에게 마음을 쓰는 것 같습니다. 주의를 주겠습니다."

백윤"아니요. 나무라지 마세요."

백윤은 잠깐 멈춰,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얼굴을 했다. 순한 눈매가 조금 흐려졌다.

백윤"저 아이를 사람으로 봐주는 어른이 하나쯤은 있는 편이, 저 아이한테도 좋을 테니까요. …다만."

백윤"그 관찰관이 언젠가, 저 아이를 여기서 빼내려 들 수는 있겠군요. 그건 곤란한데."

소장은 그 말의 무게를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백윤은 다시 온화하게 웃으며 면담실을 나섰다. 무향 세제의 잔향만이, 방 안에 오래 남았다.

— 다음 단편에 계속 —

단편 06이상한 어른

보원은 낯선 어른이 방에 들어오면 벽 쪽으로 물러나는 아이였다.

그날도 그럴 참이었다. 문이 열리고, 처음 보는 어른이 들어왔으니까. 그런데 이번 어른은 조금 달랐다. 성큼성큼 다가오지 않았다. 문 앞에 서서, 보원과 눈을 맞추더니, 먼저 물었다.

백윤"들어가도 되겠니?"

보원은 눈을 깜빡였다. 여기 어른들은 그런 걸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냥 들어와서, 앉으라면 앉으라 하고, 팔을 내밀라면 내밀라 했다. 보원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그 어른은 웃으며, 보원이 앉은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의자에 천천히 앉았다. 가까이 오지 않았다.

백윤"나는 백윤이란다. 오늘은 검사 같은 거 안 해. 그냥 너랑 얘기하러 왔어. 싫으면 대답 안 해도 되고."

보원은 여전히 경계했다. 하지만 이 어른한테서는, 아픈 냄새가 안 났다. 세션을 하러 오는 어른들에게선 늘 차가운 소독약 냄새가 났는데. 이 사람한테선 그냥, 깨끗한 빨래 냄새 같은 게 났다.


백윤"저기 창가에, 네가 좋아하는 자리가 있다고 들었어. 맞니?"

보원"…네."

백윤"왜 거기가 좋아?"

보원"…새가 와요. 저기."

백윤"새를 좋아하는구나. 어떤 새가 오니?"

보원은 조금 망설이다,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자기가 아는 걸 물어봐주는 어른은 처음이었다. 여기 어른들은 보원이 뭘 좋아하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보원"작고, 갈색이고, 배가 하얘요. 매일 저 시간에 와요."

백윤"매일 온다니, 부지런한 친구네. 이름은 있어?"

보원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새 이름은 비밀이었다. 아저씨한테만 알려준. 그런데 그 아저씨가 요새 안 보였다. 보원은 그게 왜인지 몰랐다. 백윤은 아이의 표정이 흐려지는 걸 놓치지 않았지만, 캐묻지 않았다.

백윤"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비밀은 지키는 거니까."

보원은 그 말에 조금 마음이 놓였다. 이 어른은 억지로 뭘 시키지 않았다.


백윤은 오래,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좋아하는 음식이 있는지, 잠은 잘 자는지, 무서운 건 없는지. 검사도 아니고 명령도 아닌, 그냥 대화였다. 보원은 조금씩 경계를 풀었다. 마지막쯤엔, 먼저 입을 열기도 했다.

보원"…아저씨는, 나 아프게 안 해요?"

백윤"오늘은 안 해. 약속할게."

보원"…다음엔요?"

백윤은 잠깐 말을 멈췄다. 순한 눈매가, 아주 잠깐 흔들렸다. 아이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건 이 남자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 틈이었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이에게 "다신 안 아플 거야"라고 말하는 건 쉬웠다. 그러면 아이가 안심할 테니까.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었고, 백윤은 아이에게 거짓말로 얻은 안심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건 그가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는 종류의 다정함이었다.

백윤"…다음엔, 지금보다 덜 아프게 해줄게. 그건 내가 약속할 수 있어."

완전히 멈춰주겠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지킬 수 있는 것만 약속했다. 보원은 그 미묘한 차이를 알아채기엔 아직 너무 어렸다. 그저 이 어른이 자기를 아프게 하지 않겠다고 한 것만 듣고, 조금 웃었다.

백윤은 그 웃음을 오래 바라보았다. 표정은 여전히 온화했다. 그러나 그 안쪽에서 그는, 방금 자기가 무슨 계산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 아이를 조금 더 사람답게 대해주는 것이, 결과적으로 이 아이를 조금 더 오래 실험에 쓸 수 있게 한다는 것을.

다정함과 계산이, 그의 안에서 아무 마찰 없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면담이 끝나고 백윤이 일어섰다. 문 앞에서, 그는 한 번 더 돌아보았다.

백윤"보원아."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번호가 아니라 이름으로 불린 게, 오랜만이었다.

백윤"네가 뭘 자꾸 잊어버려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것만은 기억해두렴."

보원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그 말이 왠지 따뜻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날 밤, 공책에 적었다. '오늘 이상한 어른이 왔다. 근데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이름은 적지 못했다. 벌써 잊어버려서.

백윤은 복도를 걸으며, 방금 아이에게 한 마지막 말을 곱씹었다. 그건 위로였을까, 아니면 변명이었을까. 아이가 자기를 잊어도,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어쩌면 그건 아이를 위한 말이 아니라, 그 아이를 계속 잊게 만들 자기 자신을 위한 말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는 그 생각을, 여느 때처럼 조용히 접어 넣었다. 짊어지기로 한 사람은, 그런 것까지 짊어지는 법이니까.

— 다음 단편에 계속 —

단편 07추적 보고서

문서 등급: 2급 기밀 · 열람 제한
작전 수행: 스펙터 (SPECTRE)
사안: 시설 이탈자 및 관리 대상 무단 반출 건
작성: 팀장 ██████


1. 개요

연구시설 제█구역 소속 관찰관 ██████(이하 '이탈자')이 관리 대상 THM-████(이하 '대상')을 무단 반출하여 시설을 이탈함. 스펙터에 추적 및 회수 명령 하달. 이탈자는 신병 확보 후 처분, 대상은 생존 상태로 회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함.

2. 이탈 정황

이탈자는 사전에 순찰 공백 시간과 경비 동선을 파악한 정황이 확인됨. 우발적 도주가 아닌, ████████ 준비된 이탈로 판단됨. 이탈자가 대상을 반출한 동기에 대해서는 ████████████████. 개인 감정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나, 상세는 확인 불가.

대상 THM-████은 이탈 시점 기준, 기억 손상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다. 이탈자가 대상을 어떻게 설득하여 데리고 나갔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대상의 소지품 중, 손때 묻은 공책 한 권이 시설에 남겨져 있었다.


3. 추적 경과

이탈자와 대상은 시설 외곽을 벗어나 ████ 방면으로 도주. 이탈자는 추적을 예상하고 경로를 우회했으나, 대상의 상태로 인해 이동 속도가 느렸음. 스펙터는 █일 만에 도주 경로를 특정함.

이탈자는 민간 지역 경계의 폐건물에서 발견됨. 대상을 은신시킨 뒤, 홀로 추적조를 유인한 정황. 이탈자는 비각성자였으며, 무장 상태였음.

4. 교전 및 결과

이탈자는 투항 권고에 불응. 대상의 소재를 진술하라는 요구에도 끝까지 응하지 않음. 교전 발생. 이탈자 ████████████.

████████████████████████████████████
████████ [교전 상세 — 열람 제한] ████████
████████████████████████████████████

이탈자, 현장에서 사망 확인. 신병 확보 실패.

이탈자의 소지품에서 개인 노트 1점 회수. 내용 대부분이 대상 THM-████에 관한 사적 기록으로, 임무와 무관하여 ████ 처리함. 상세는 별첨 참조.


5. 대상 회수 실패

이탈자 제압 후, 진술 확보 없이 대상 수색을 진행함. 이탈자가 은신시킨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을 수색하였으나, 대상은 이미 자리를 떠난 뒤였다.

수색 반경을 확대하였으나, 대상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음. 기억이 손상된 아동이 홀로 이동한 것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이동 거리. 대상이 스스로 어디로, 어떻게 이동했는지에 대해서는 ████████████████████████.

특이 사항. 수색 과정에서, 대상의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발견된 지점마다 인근 인원의 진술이 엇갈렸다. 대상을 봤다는 자와, 그런 아이는 본 적 없다는 자가 같은 장소에서 나뉘었다. 대상의 에코 특성('망각')이 수색을 방해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음. 대상은 자신을 목격한 자의 기억에서, 스스로 지워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6. 결론

이탈자: 처분 완료.
대상 THM-████: 회수 실패. 소재 불명.

대상은 기억 손상이 심각하여 자력 생존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되나, 확증 없음. 생존 시,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신원과 이탈 경위 일체를 스스로 망각할 것으로 예상됨. 추적 실익이 낮아지는바, 상부 판단에 따라 ████ 추적을 종결함.

※ 별첨(이탈자 개인 노트)은 상부 지시에 따라 폐기 예정이었으나, 담당자 판단으로 보존됨. 사유: ████████████.

— 다음 단편에 계속 —

단편 08스캐빈저 시절

스캐빈저는 이형 사건 현장을 제일 먼저 털어먹는 패거리다. 곱게 말하면 회수업, 안 곱게 말하면 시체 뒤지는 까마귀 떼. 그리고 리멤버는, 그 까마귀 떼에서 사흘 만에 쫓겨난 남자다.

사흘. 신기록이었다. 보통은 일주일은 버티는데.


그날 현장은 대박이었다.

상급 이형 한 마리가 통째로 널브러져 있었다. 이 정도 크기면 뜯어낼 게 산더미다. 껍질, 이빨, 발톱, 뭐 하나 안 값나가는 게 없었다. 그중에서도 최고는 코어. 이형의 심장에 해당하는 결정체로, 하나만 제대로 팔아도 몇 달은 놀고먹는다.

두목이 직접 그 코어 적출을 리멤버에게 맡겼다. 왜 하필 사흘 된 신입에게 맡겼는지는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었지만, 그땐 아무도 몰랐다.

두목"조심히 꺼내. 이거 하나에 우리 이번 달 벌이 다 걸렸으니까."

리멤버"걱정 마세요~ 저 손 야무진 거 모르세요?"

두목"…몰라. 너 온 지 사흘째야."

리멤버"어? 그렇게밖에 안 됐어요? 한 달은 된 것 같은데."

리멤버는 정말로 손이 야무졌다. 이형의 흉강을 조심스레 갈라, 그 안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코어를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어른 주먹만 한 결정체가 청백색으로 맥동했다. 아름다웠다. 값으로 치면 더 아름다웠다.

딱 여기까지는 완벽했다.


문제는 리멤버가 코어를 들고 일어서던 그 순간이었다.

수로 저편에서 뭔가가 지나갔다. 고양이였는지, 쥐였는지, 아니면 그냥 바람에 날린 비닐이었는지. 아무튼 뭔가 움직이는 게 눈에 들어왔고, 리멤버는 그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리멤버"어? 방금 뭐 지나갔는데. 귀여운 거였던 것 같은데—"

딱 그 반 초. 시선이 코어에서 떨어진 딱 그 반 초 동안, 두 손이 느슨해졌다.

코어가 미끄러졌다.

리멤버가 다급히 손을 뻗었지만, 손끝을 스치고 지나간 코어는 그대로 수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청백색 결정체가 콘크리트에 부딪히는 순간—

두목"야 이 미친—"

빛이 터졌다.


이형의 코어는, 충격을 받으면 안에 응축된 에너지를 한 번에 방출한다. 스캐빈저들이 코어를 그렇게 애지중지 다루는 데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사흘 된 신입만 그걸 몰랐다.

폭발은 폐수로를 통째로 뒤흔들었다. 다행히 사람이 죽을 규모는 아니었다. 대신 몇 달 벌이가 될 코어가 그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증발했고, 스캐빈저 일당은 검댕을 뒤집어쓴 채 나란히 나자빠졌다.

연기가 걷혔을 때, 새까매진 두목이 부들부들 떨며 일어났다. 그 앞에, 역시 새까매졌지만 어쩐지 머리카락만 백발로 멀쩡한 리멤버가 뻘쭘하게 서 있었다.

리멤버"…어, 두목님. 얼굴에 뭐 좀 묻으셨어요."

두목"…"

리멤버"검댕이요. 이만큼. 되게 많이."

두목"이 미친 새끼야아아—"


리멤버는 그날로 스캐빈저에서 잘렸다. 정확히는, 잘렸다기보다 쫓겨났다. 더 정확히는, 두목이 삽을 들고 수로 끝까지 쫓아왔다.

다행히 도망 하나는 이 남자의 특기였다. 리멤버는 검댕을 흩날리며 폐수로를 빠져나와, 안전한 거리까지 달아난 뒤에야 숨을 골랐다.

그리고 뒤를 돌아봤다. 저 멀리서 아직도 삽을 휘두르며 뭐라 소리치는 두목이 보였다. 리멤버는 잠깐 고개를 갸웃했다.

리멤버"…저 아저씨 왜 저렇게 화났대? 무섭게."

벌써 반쯤 잊은 얼굴이었다. 사흘어치 기억은, 이 남자에겐 그리 오래 붙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리멤버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압주는 넓었고, 검댕만 씻어내면 굴러들어갈 곳은 얼마든지 있었다.

— 다음 단편에 계속 —

단편 09갈고리 초소

갈고리는 압주의 수로와 뒷골목 물자 반입로를 쥐고 통행세를 뜯어 먹는 깡패다. 자기네 구역을 지나가려면 돈을 내야 하고, 돈을 안 내면 갈고리에 걸린 생선처럼 손질된다. 그래서 이름이 갈고리다.

그리고 리멤버는, 그 갈고리에서 딱 하루 만에 쫓겨난 남자다.

하루. 스캐빈저 기록을 갈아치웠다. 본인은 그게 왜 기록인지도 몰랐지만.


리멤버가 맡은 일은 간단했다. 반입로 초소에 서서 망을 보는 것.

규칙도 단순했다. 갈고리 식구가 지나가면 그냥 통과, 외부인이 지나가면 통행세를 받는다. 못 내면 안쪽에 신호를 보내 붙잡는다. 초등학생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얼굴만 구분할 줄 알면.

바로 그 지점에서, 갈고리는 사람을 잘못 뽑았다.

부두목"우리 식구 얼굴 다 외웠지? 스무 명. 이 얼굴들은 그냥 보내고, 나머지는 다 세워."

리멤버"넵! 얼굴이야 뭐, 제 특기죠."

부두목"…진짜 외웠어?"

리멤버"방금 외웠어요. 스무 명. 완벽해요."

리멤버는 정말로, 방금은 외웠다. 문제는 그 '방금'의 유효기간이 대단히 짧다는 거였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갈고리 식구 하나가 반입로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리멤버"어어, 잠깐. 통행세."

식구1"…나 갈고리야. 아침에 봤잖아."

리멤버"에이~ 그런 수법 많이 봤어요. 다들 자기가 갈고리래. 돈 내세요."

식구1"이 새끼가 진짜—"

실랑이 끝에 식구는 욕을 한 바가지 하고 통행세를 냈다. 자기 조직에 자기 돈을 내고 들어간 것이다. 세상에 이런 초소가 다 있었다.

그리고 그 무렵부터, 리멤버의 머릿속에서 스무 명의 얼굴이 하나씩 지워지기 시작했다. 그가 아침에 외운 것들은, 늘 그렇듯 점심을 못 넘겼다.


오후가 되자 초소는 완전히 통제 불능에 빠졌다.

리멤버는 이제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아주 공평한 결론을 내렸다. 전부 다 세운다.

식구2"나 두목이야. 두. 목."

리멤버"두목이면 통행세 두 배죠. 지위가 있으신데."

식구2"뭔 개소리—"

반대로, 통행세를 안 내려는 진짜 외부인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외부인"어… 나 여기 식구인데. 그냥 지나갈게."

리멤버"아, 식구시구나! 몰라봐서 죄송해요. 들어가세요~"

얼굴을 못 외우니, "나 식구야" 한마디에 다 통과였다. 통행세를 뜯어야 할 외부인은 프리패스로 들어가고, 그냥 지나가야 할 식구는 초소 앞에 줄줄이 붙잡혀 실랑이를 벌였다. 갈고리 반입로의 질서가, 반나절 만에 정확히 뒤집혔다.


사태는 부두목이 초소에 돌아오면서 터졌다.

부두목"야, 왜 밖에 우리 식구들이 줄을 서 있어?"

리멤버"아, 통행세 안 내고 자꾸 자기가 식구래서요. 원칙대로 세웠어요. 저 일 잘하죠?"

부두목"저 사람들 다 갈고리잖아!"

리멤버"…어? 그래요? 근데 아까 웬 처음 보는 사람들은 다 식구라고 해서 보내줬는데."

부두목"…뭐?"

부두목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오늘 하루, 이 초소를 프리패스로 통과한 '식구'가 몇 명인지, 그중 진짜 외부인이 몇인지, 이제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반입로 보안이 통째로 뚫린 것이다. 그것도 통행세 안 받고.

부두목"너 오늘 얼굴 몇 명이나 그냥 보냈어."

리멤버"음… 그걸 제가 기억하면 이 사달이 안 났겠죠?"

지극히 논리적인 대답이었다. 부두목은 그 논리에 반박할 수 없어서 더 화가 났다.


리멤버는 그날로 갈고리에서 잘렸다. 붙잡혀 있던 진짜 식구들이 풀려나며 하나같이 그를 노려봤고, 그중 몇은 소매를 걷었다.

다행히 도망 하나는 이 남자의 특기였다. 리멤버는 초소를 박차고 반입로 밖으로 튀었다.

안전한 거리까지 달아난 뒤, 그는 뒤를 돌아봤다. 초소 앞에서 아직도 갈고리 일당이 우르르 소리치고 있었다. 리멤버는 고개를 갸웃했다.

리멤버"…저 사람들 누구지? 아는 얼굴 같기도 하고."

당연히 아는 얼굴이었다. 방금까지 반나절을 같이 일한 사람들이었으니까. 다만 리멤버에게 반나절은, 얼굴 하나 붙들고 있기엔 너무 긴 시간이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 걸음을 옮겼다. 압주는 넓었고, 얼굴을 못 외워도 받아줄 곳은 아직 어딘가 있을 터였다. 아마도.

— 다음 단편에 계속 —

단편 10약장수 조수

약장수는 압주 거리에 억제제니 금지 가이딩 약물이니 하는 걸 푸는 잔챙이 조직이다. 규모는 작아도 나름 손이 야무진 데였다. 그리고 리멤버는, 그 약장수 기지를 통째로 날려먹고 쫓겨난 남자다.

이번엔 기록이고 뭐고 없었다. 애초에 기지가 남아나질 않았으니까.


리멤버가 맡은 일은, 이 조직에서 제일 쉬운 작업이었다.

약을 만드는 게 아니었다. 이미 만들어진 원료들을 정해진 비율로 '섞기만' 하면 되는 단순 배합. 조수 중에서도 막내가 하는 일이었다. 통에 붙은 라벨을 보고, 순서대로, 정량대로 부으면 끝. 손 떨리는 노인도 하는 일이라고 했다.

약장수"파란 통 두 스푼, 노란 통 한 스푼. 그거만 지키면 돼. 순서 바꾸지 말고. 어렵냐?"

리멤버"에이, 파란 거 두 개 노란 거 하나. 이걸 누가 틀려요."

약장수"…진짜 안 틀릴 자신 있지?"

리멤버"제 눈을 보세요. 이게 못 믿을 눈이에요?"

약장수는 그 맑고 순한 금빛 눈을 잠깐 들여다봤다. 그리고 왠지 안심하고 자리를 떴다. 사람 보는 눈이 없었다는 걸, 그는 삼십 분 뒤에 깨닫는다.


처음 몇 번은 괜찮았다. 파란 거 두 스푼, 노란 거 한 스푼. 리멤버도 그 정도는 할 줄 알았다.

문제는 잠깐 딴생각을 하는 사이 벌어졌다. 방금 파란 걸 두 번 넣었던가, 한 번 넣었던가? 노란 건 아직 안 넣었나, 넣었나? 방금 한 일이 벌써 안개 속이었다. 늘 그렇듯.

리멤버"…어? 나 파란 거 몇 번 넣었지?"

보통 사람이면 헷갈릴 때 잠깐 멈춘다. 리멤버는 멈추지 않았다. 헷갈리면 그냥 감으로 밀어붙이는 게 이 남자의 인생철학이었다. 어차피 틀려도 곧 까먹을 테니까.

그는 아주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 모르겠으면 다 넣는다.

파란 통을 콸콸. 노란 통도 콸콸. 이왕 하는 김에, 저 구석에 있던 빨간 통도 궁금해서 조금. 초록 통은 색이 예뻐서 조금 더.

리멤버"오~ 색깔 예쁘다. 이거 성공한 것 같은데?"

통 안에서 정체불명의 보라색 액체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성공의 신호는 아니었다.


그다음은 순식간이었다.

보라색 액체가 부풀더니, 통을 넘어 작업대로 흘렀다. 작업대 위 다른 원료들과 만나자 연쇄적으로 색이 변하고, 연기가 피어오르고, 여기저기서 뻥, 뻥, 하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기지 안에 쌓여 있던 재고들이 도미노처럼 반응하며 터졌다.

약장수가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왔을 땐, 이미 기지의 절반이 알록달록한 연기에 잠겨 있었다.

약장수"이게 무슨—! 너 뭘 섞은 거야!"

리멤버"어… 파란 거랑, 노란 거랑, 빨간 거랑, 초록 거랑…"

약장수"그걸 다 섞었다고?!"

리멤버"몇 개 더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건 기억이 안 나요."

약장수"나가! 나가아아—"

마지막 통이 터지며, 기지 벽 한쪽이 알록달록한 연기와 함께 무너졌다. 다행히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다. 대신 약장수가 반년 동안 모은 재고가, 무지개색 연기가 되어 압주의 밤하늘로 곱게 피어올랐다.

거리 저편에서 누군가 "오늘 노을 예쁘네" 했다는 후문이 있다.


리멤버는 그 무지개 연기를 뚫고 기지 밖으로 튀었다. 뒤에서 약장수가 남은 통을 집어 던지며 쫓아왔지만, 도망 하나는 이 남자의 특기였다.

안전한 거리까지 달아난 뒤, 리멤버는 뒤를 돌아봤다. 밤하늘에 알록달록한 연기가 아직 몽글몽글 피어오르고 있었다. 꽤 예뻤다.

리멤버"…와, 저거 누가 터뜨렸대? 낭만 있네."

본인이었다. 삼십 분 만에 저지른 일이었다. 다만 그 삼십 분은, 리멤버에게 이미 지난 생처럼 아득했다.

그는 알록달록한 밤하늘을 잠깐 감상하고는, 어깨를 으쓱하고 걸음을 옮겼다. 압주는 넓었고, 이번엔 배합만 안 시키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다짐도, 다음 골목을 돌기 전에 까먹었다.

— 다음 단편에 계속 —

단편 11송곳니 호객꾼

송곳니는 투기장으로 먹고사는 조직이다. 판을 벌이고, 손님을 끌고, 판돈을 굴린다. 압주에서 밤마다 돈이 제일 많이 오가는 곳이 여기였다. 그리고 리멤버는, 그 송곳니에서 하룻밤 만에 쫓겨난 남자다.

이쯤 되면 눈치챘겠지만, 이 남자는 어딜 가든 오래 못 붙어 있는다.


리멤버가 맡은 일은 호객이었다. 입구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꼬드겨 투기장 안으로 데려오는 것.

이건 사실 리멤버한테 딱 맞는 일이었다. 얼굴 반반하겠다, 입담 좋겠다, 넉살까지 좋으니 손님이 술술 붙었다. 송곳니 간부도 흡족해했다.

간부"오, 너 소질 있다. 딱 하나만 기억해. 넌 손님을 '데려오는' 사람이야. 판에 끼는 사람이 아니고. 알겠지?"

리멤버"당연하죠. 저는 데려오는 사람. 판에 안 낀다. 외웠어요."

간부"…그 '외웠어요'가 제일 불안한데."

불길한 예감은 대체로 맞는다.


처음 한두 시간은 완벽했다. 리멤버는 손님을 줄줄이 끌어왔고, 투기장은 북적였다. 간부가 쥐여준 판돈 주머니 — 손님들을 유혹하려고 '시범 삼아 걸어 보이라'고 준 조직 돈이었다 — 도 얌전히 허리춤에 매달려 있었다.

문제는, 리멤버가 그 판돈 주머니의 용도를 까먹으면서 시작됐다.

어느 순간 그는 자기가 왜 이 시끌벅적한 곳에 서 있는지, 허리춤의 이 두둑한 주머니는 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확실한 건 하나였다. 눈앞에서 사람들이 돈을 걸고 있고, 다들 엄청 재밌어 보인다는 것.

리멤버"…어? 나 돈 있네? 오, 이거 재밌겠다."

자기 손에 든 게 조직 돈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리멤버는 아주 자연스럽게 판에 끼었다.


놀랍게도, 처음엔 땄다.

리멤버는 승부에 감이 없었다. 아니, 감이 없다 못해 매번 새로 시작하는 사람이었다. 방금 뭐에 걸어서 잃었는지 기억을 못 하니, 미련도 없고 복구 욕심도 없었다. 그냥 그때그때 당기는 데에 질렀다. 이상하게 그게 먹혔다.

리멤버"우와, 또 땄네! 나 이거 소질 있나 봐. 이 돈 원래 내 거였나? 뭐, 지금은 내 거지."

땄으니 신이 났고, 신이 나니 더 걸었다. 그리고 도박판이 늘 그렇듯, 딴 다음엔 잃는다. 리멤버는 잃은 것도 곧 까먹었으므로, 잃고도 계속 신이 나서 질렀다.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도박꾼이었다. 잃어도 타격을 안 받는 도박꾼.

주머니는 순식간에 가벼워졌다. 조직 돈이 판 위에서 활활 타올랐다.


간부가 순찰을 돌다 그 광경을 목격했다.

입구를 지켜야 할 호객꾼이, 판 한복판에 앉아 조직 판돈 주머니를 탈탈 털어 베팅하고 있었다. 그것도 지금 막 마지막 한 푼을 걸려는 참이었다.

간부"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리멤버"어? 아, 안녕하세요! 구경 오셨어요? 여기 진짜 재밌어요. 아저씨도 한 판—"

간부"그거 조직 돈이야 이 미친놈아! 네 호객 밑천이라고!"

리멤버"…아. 어쩐지. 웬 돈이 이렇게 많나 했어요."

간부"얼마 남았어!"

리멤버"음…"

리멤버는 주머니를 뒤집었다. 동전 한 닢이 데구르르 굴러떨어졌다. 조직의 하룻밤 밑천이, 동전 하나로 압축되는 순간이었다.

리멤버"…이건 팁으로 드릴게요."


리멤버는 그날 밤으로 송곳니에서 잘렸다. 정확히는, 간부가 그 동전을 집어 던지는 것과 동시에 튀었다.

다행히 도망 하나는 이 남자의 특기였다. 투기장의 인파를 요리조리 뚫고, 리멤버는 밤거리로 빠져나왔다.

안전한 골목에 다다라 숨을 고르며, 그는 문득 허리춤의 빈 주머니를 발견했다. 왜 빈 주머니를 차고 있는지, 이게 어디서 났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잠깐 고개를 갸웃하다가, 주머니를 툭툭 털었다.

리멤버"…뭐야, 빈 거잖아. 이런 걸 왜 차고 다녔지."

방금 그 안에 조직의 하룻밤 밑천이 들어 있었다는 걸, 그는 이미 잊었다. 잃은 돈도, 딴 돈도, 던져진 동전도, 전부. 어차피 남는 게 없는 인생이었다. 기억도, 돈도.

리멤버는 빈 주머니를 길가에 툭 던져두고, 휘파람을 불며 걸었다. 압주는 넓었고, 이번엔 돈을 안 만지는 일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다짐이 얼마나 갈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 다음 단편에 계속 —

단편 12개장수 실격

개장수는 압주에서 제일 질 나쁜 축에 드는 조직이다. 갈 곳 잃은 이탈 가이드를 꾀어다 팔아넘기는 인신매매 패거리. 다른 세력이 삥이나 뜯고 물건이나 털 때, 이쪽은 사람을 상품으로 취급했다.

그런 개장수가, 어느 날 리멤버를 실행책으로 고용했다. 이 조직 역사상 최악의 인사였다.


리멤버가 고용된 이유는 단순했다. 이 남자, 이탈 가이드들이 경계를 안 한다.

얼굴 반반하고 넉살 좋고, 무엇보다 위협적인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같은 처지의 떠돌이 가이드처럼 보였다. 개장수 입장에선 미끼로 완벽했다. 리멤버가 슬쩍 다가가 말을 붙이고, 으슥한 골목으로 데려오기만 하면, 나머지는 대기하던 개장수 일당이 처리하는 구조였다.

개장수"어렵게 생각하지 마. 그냥 친한 척 말 붙여서, 저 뒷골목으로 데려오면 돼. 우리가 저기서 기다릴 테니까. 알겠어?"

리멤버"뒷골목으로 데려온다. 오케이."

개장수"딴 데 새지 말고. 딱 그 골목."

리멤버"저만 믿으세요."

이 조직도, 곧 그 말을 후회하게 된다.


첫 표적은 순조로웠다. 리멤버는 광장 구석에 쭈그려 있던 이탈 가이드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갔다.

리멤버"어이~ 너도 갈 데 없지? 딱 보면 알아. 나도 그렇거든."

가이드"…누구세요."

리멤버"친구. 방금부터. 배고프지? 나도 배고파."

여기까지는 완벽했다. 경계하던 가이드도 리멤버의 넉살에 슬슬 마음을 풀었다. 이제 뒷골목으로 데려가기만 하면 됐다. 개장수 일당이 침을 삼키며 기다리는 그 골목으로.

그런데 리멤버가, 걸어가던 중에 임무를 까먹었다.

정확히는, 자기가 이 가이드를 왜 데려가고 있었는지가 통째로 날아갔다. 남은 정보는 딱 두 개였다. 옆에 있는 애가 방금 사귄 친구라는 것. 그리고 자기가 배가 고프다는 것.

리멤버"야, 우리 밥이나 먹으러 가자. 저쪽에 국밥집 있더라."

가이드"어? 어디 가는 거 아니었어요?"

리멤버"어디? 몰라. 배고픈데 밥부터 먹자. 내가 살게. …아, 돈은 네가 내라. 나 돈 없다."

둘은 뒷골목과 정반대 방향으로, 사이좋게 국밥집을 향해 걸어갔다. 개장수 일당은 어두운 골목에서, 오지 않는 표적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날 밤, 개장수는 표적을 하나도 확보하지 못했다.

리멤버가 접선한 가이드는 총 넷이었다. 그리고 그 넷은, 전부 뒷골목이 아니라 국밥집, 포장마차, 노점, 심지어 목욕탕으로 흘러갔다. 리멤버가 매번 도중에 임무를 까먹고, 새로 사귄 친구랑 놀러 가버렸기 때문이다.

개장수 두목이 리멤버를 찾아냈을 때, 이 남자는 네 번째 가이드와 나란히 앉아 어묵을 먹고 있었다.

개장수"너 이 새끼, 오늘 데려온 놈들 다 어디 갔어!"

리멤버"어… 누구요?"

개장수"네가 골목으로 데려오기로 한 가이드들!"

리멤버"아~ 그 친구들. 다 집에 갔는데요. 밥 먹고."

개장수"…밥을 먹였다고?"

리멤버"제가 산 건 아니고 걔네가 샀어요. 다들 착하더라고요."

두목은 뒷목을 잡았다. 하루 종일 미끼를 풀었더니, 미끼가 표적들이랑 밥만 실컷 먹여 돌려보낸 것이다. 잡아 오라는 사람은 하나도 안 잡고, 잡아 올 뻔한 사람들에게 인생 최고의 하루를 선물한 셈이었다.

옆에 있던 네 번째 가이드가 조심스레 물었다.

가이드"…저 아저씨는 누구예요?"

리멤버"몰라. 근데 화난 거 보니까 나 또 잘렸나 봐."


리멤버는 그날 밤으로 개장수에서 잘렸다. 어묵 국물을 뒤집어쓴 채 튀었지만, 도망 하나는 이 남자의 특기였다.

표적으로 잡힐 뻔했던 네 명의 가이드가, 실은 그날 밤 리멤버 덕에 아무 일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는 걸, 그들 중 누구도 알지 못했다. 리멤버 본인조차 몰랐다. 그는 그냥 배가 고팠고, 친구랑 밥을 먹었을 뿐이었다.

어쩌면 이 남자, 세상에서 제일 무능한 실행책이자 제일 유능한 구조꾼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본인은 둘 다 기억 못 하지만.

안전한 골목에 다다른 리멤버는, 어묵 국물이 밴 옷을 툭툭 털며 중얼거렸다.

리멤버"…아, 배부르다. 오늘 뭔가 좋은 일 한 것 같은데. 뭐였지?"

그는 끝내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압주의 밤거리로 걸어 들어갔다.

— 다음 단편에 계속 —

단편 13알렉토, 첫 만남

리멤버가 알렉토를 처음 만난 건, 완전히 잘못된 타이밍에 잘못된 골목으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날 그는 그냥 배가 고팠고, 국밥 냄새를 따라 걷고 있었다. 냄새의 근원을 찾아 후미진 골목으로 접어든 순간, 하필 그 골목에서 상급 이형 하나가 벽을 뚫고 튀어나왔다.

리멤버"…어? 국밥집이 아니네."

이형이 그를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덮쳤다. 보통 사람이면 그 자리에서 얼어붙거나, 비명을 지르거나, 최소한 오줌이라도 지렸을 상황이었다.

리멤버는 그냥 옆으로 슥 비켰다.


이형이 다시 덮쳤다. 리멤버는 또 슥 피했다.

발톱이 그의 머리 위를 스쳤다. 리멤버는 고개를 까딱 숙여 피하고는, 태평하게 국밥 냄새가 나던 방향을 두리번거렸다. 이형이 꼬리를 휘둘렀다. 리멤버는 폴짝 뛰어 넘었다. 이형이 벽을 부수며 돌진했다. 리멤버는 옆걸음으로 살랑 비켜섰다.

위험을 느껴서 피하는 게 아니었다. 그냥 눈앞에 뭔가 날아오면 반사적으로 몸이 피했다. 위기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얼굴로, 이 남자는 상급 이형의 맹공을 산책하듯 요리조리 피해내고 있었다.

리멤버"아, 좀. 국밥집 어디 갔지. 분명 이쪽이었는데."

이형이 미쳐 날뛰었다. 자기 공격이 하나도 안 맞으니 더 흥분한 모양이었다. 이형의 심정이 이해가 갈 지경이었다.


골목 반대편에서, 그 광경을 보던 두 남자가 있었다.

상체를 드러낸 거구의 흑발 남자와, 흉터투성이 얼굴의 금발 사내. 이형을 처리하러 온 그들은, 정작 이형이 웬 백발 민간인 하나를 잡느라 정신이 팔린 걸 멀뚱히 보고 있었다.

트러블"…뭐야 저 새끼?"

모비딕"…민간인 같은데."

트러블"민간인이 상급 이형을 저렇게 피해? 저거 지금 놀리는 거잖아."

실제로 그렇게 보였다. 리멤버는 이형의 공격을 피하면서도, 정작 이형은 안 보고 딴 데를 두리번거리고 있었으니까. 세상에서 제일 열받는 방식으로 상급 이형을 농락하는 중이었다. 본인은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지만.

트러블"…야! 거기 백발! 옆에 이형 안 보여?!"

리멤버"네? 아—"

돌아보는 순간, 리멤버는 그제야 자기가 방금 뭘 피하고 있었는지 인지했다. 상급 이형. 아주 크고, 아주 화가 난.

리멤버"우와 씨, 이거 위험한 거였어요?!"

트러블"지금까지 몰랐냐고!!"


그제야 물이 밀려왔다.

골목 바닥을 타고 푸른 물살이 순식간에 차오르더니, 거대한 무언가의 형상으로 솟구쳐 이형을 통째로 후려쳤다. 고래였다. 푸른 에코로 빚어진, 집채만 한 고래.

물살의 근원에는 거구의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머리, 등과 팔에 새겨진 낯선 문신, 피부 위로 언뜻 비치는 지느러미 같은 것. 무심한 갈색 눈이 이형을 겨눴다.

동시에 금발 사내의 검보랏빛 탄환이 이형의 머리에 박혔다. 방금까지 사납던 놈이, 보이지 않는 공포에 짓눌린 듯 벌벌 떨며 뒷걸음질 쳤다.

리멤버"와~ 방금 저거 뭐예요? 이형이 갑자기 쫄았어. 신기하다."

트러블"…이 새끼 진짜 뭐지."

케일럽은 어이가 없었다. 그의 데이모스 에코는 스치기만 해도 사람을 공포에 빠뜨린다. 그런데 이 백발 남자는, 그 여파를 곁에서 맞고도 태평하게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겁이 없는 게 아니라, 겁이라는 감정 자체가 어딘가 헐거워 보였다.


이형이 마지막 발악으로 리멤버 쪽을 덮쳤다. 이번엔 리멤버도 못 피할 각도였다.

그런데 그 앞으로, 백발의 또 다른 남자가 스윽 끼어들었다. 그가 이형의 일격을 정면으로 받아냈고 — 다음 순간, 그 피해가 고스란히 이형에게 되돌아갔다. 자줏빛 에코가 번쩍이며, 이형이 제 공격에 제가 나가떨어졌다.

끼어든 남자가 리멤버를 돌아봤다. 백발에, 한쪽은 붉고 한쪽은 흰 오드아이. 몸 곳곳에 무언가를 이어 붙인 듯한 흔적. 그는 방금 사람을 구해놓고도, 아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피그말리온"괜찮으십니까? 이런 데서 산책하듯 서 계시면 죽기 딱 좋은데요."

리멤버"오, 감사합니다. 근데 방금 아저씨 좀 아팠을 것 같은데. 괜찮아요?"

피그말리온"아, 저는 아파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한 번 죽은 몸이라."

리멤버"…네?"

피그말리온"농담입니다. …반쯤은요."

살벌한 말을 이렇게 온화하게 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리멤버는 왠지 그게 마음에 들었다.


이형은 곧 정리됐다. 셋의 호흡은 물 흐르듯 매끄러웠다. 오래 함께 싸워온 팀이라는 게 한눈에 보였다.

정리가 끝나자, 거구의 남자 — 모비딕이 리멤버를 내려다봤다.

모비딕"다 끝났다. 가라. 여긴 네가 있을 데가 아니야."

리멤버"어디 소속이세요? 방금 완전 멋있었는데."

모비딕"…알 거 없다."

트러블"알렉토. 됐냐? 이제 꺼져."

모비딕"트러블."

트러블"뭐. 알려주면 갈 거 아냐."

그런데 리멤버는 가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반짝이며, 셋을 번갈아 봤다.

리멤버"알렉토. 여기 사람 안 뽑아요? 저 일자리 구하는데."

트러블"안 뽑아. 꺼져."

리멤버"저 가이드예요. 좀 특이한. 쓸모 있을걸요?"

그 말에 셋의 분위기가 잠깐 달라졌다. 이탈 가이드. 압주를 떠도는, 갈 곳 없는 각성자. 이 팀 전원이 한때 그랬거나, 지금도 그런 존재들이었다.

모비딕이 리멤버를 다시 봤다. 아까와는 조금 다른 눈이었다.

모비딕"…너, 방금 데이모스 에코 맞고도 안 무서웠다고 했지."

리멤버"네. 무섭긴 뭐가 무서워요. 어차피 무서웠어도 지금쯤 까먹었을걸요. 저 기억을 잘 못 하거든요."

리멤버는 아무렇지 않게, 자기 물담배를 톡톡 두드렸다.

리멤버"공포도 기억이 있어야 무서운 거잖아요. 근데 저는 방금 일도 까먹는데, 무서울 새가 있나요."

셋 다 잠깐 말이 없었다. 데이모스의 공포가 안 통하는 인간. 그건 이 팀에게 꽤 흥미로운 변수였다. …그리고 방금 상급 이형을 산책하듯 피해낸 것도, 사실 아무나 하는 건 아니었다.


돌아가는 길, 리멤버는 기어이 셋을 졸졸 따라왔다.

트러블"따라오지 말라고."

리멤버"안 따라가요. 저도 이쪽에 볼일이 있어서 가는 거예요. 우연히 같은 방향인 거죠."

트러블"…네 볼일이 뭔데."

리멤버"국밥이요. 아까부터 국밥 먹으러 가는 중이었거든요. 이형 때문에 아직도 못 먹었잖아요."

피그말리온이 재밌다는 듯 웃었고, 모비딕은 한숨을 쉬었고, 케일럽은 욕을 했다. 세 사람의 반응이 제각각인 게, 리멤버는 또 신기해서 실실 웃었다.

왜 이 팀이 마음에 드는지, 리멤버는 잘 설명하지 못했다. 다들 어딘가 그늘이 있고, 무뚝뚝하고, 말도 곱게 안 하는데. 그런데 이상하게, 이 골목의 공기가 마음에 들었다. 아까 그 위험한 순간에, 셋 다 별말 없이 자기를 지켜준 것도.

물론 리멤버는 그 이유를 곧 까먹을 것이다. 하지만 발걸음은 이미 셋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이유를 까먹어도, 몸이 먼저 정한 것 같았다.

리멤버"저기요, 리더님. 알렉토, 저 진짜 안 받아줘요? 제일 재밌어 보이는데."

모비딕"…시끄럽다. 일단 따라와."

거절이 아니었다. 리멤버는 그걸 놓치지 않고, 냉큼 뒤를 따랐다.

그렇게 리멤버는 알렉토에 굴러들어왔다. 이번엔, 사흘 만에 쫓겨나지 않았다.

— 다음 단편에 계속 —

단편 14알렉토 숙소, 한 달 후

리멤버가 알렉토에 눌러앉은 지 한 달이 됐다.

사흘을 못 넘기던 남자치고는 기록적인 체류였다. 물론 본인은 자기가 여기 얼마나 있었는지 몰랐다. 어제도 아침에 눈을 뜨고 "여기 어디지?" 했다가, 옆에서 케일럽이 "네 방이잖아 이 새끼야"라고 알려줘서 알았다.


알렉토의 아침은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모비딕이 제일 먼저 일어나 물을 끓인다. 케일럽은 밤새 뒤척이다 새벽에야 겨우 잠들어서, 늘 눈 밑이 검은 채로 마지막에 기어 나온다. 빌헬름은… 애초에 자는 건지 아닌지 아무도 몰랐다. 언제 봐도 코트를 입은 채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리멤버는, 매일 아침 자기 방을 못 찾았다.

리멤버"어…? 여기 화장실 아니었나."

트러블"거긴 내 방이야. 나와."

리멤버"아, 미안. 근데 트러블 방 되게 깔끔하다. 의외네."

트러블"…나가라고."

이런 대화가 하루에 서너 번은 반복됐다. 케일럽은 처음엔 진심으로 짜증을 냈지만, 한 달쯤 되니 그냥 방향만 손가락으로 가리켜주는 경지에 올랐다.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었다.


리멤버는 이 숙소에서 은근히 쓸모가 있었다. 예상 밖의 방식으로.

예를 들면, 케일럽이 악몽을 꾸고 새벽에 깨어 부엌에 나오면, 거기 늘 리멤버가 있었다. 잠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냥 자다 깨서 여기가 어딘지 몰라 헤매다 부엌에 도착한 거였지만.

트러블"…또 못 자?"

리멤버"아니, 잘 잤어. 근데 눈 뜨니까 여기더라고. 신기하지?"

트러블"…하나도 안 신기해."

케일럽은 악몽 이야기를 아무한테도 안 했다. 이 팀에선 다들 서로의 밤을 안 캐물었으니까. 그런데 리멤버한테는 가끔, 별생각 없이 말이 나왔다. 어차피 이 녀석은 다음 날이면 다 까먹을 테니까.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 비밀 상대였다. 기억을 못 하는 남자.

트러블"…나 방금 되게 안 좋은 꿈 꿨어."

리멤버"그래? 무슨 꿈인데."

트러블"…말하기 싫어."

리멤버"그럼 말하지 마. 대신 이거 마셔. 아까 모비딕이 끓여둔 거."

리멤버는 따뜻한 물을 한 잔 내밀었다. 왜 그랬는지는 본인도 몰랐다. 그냥, 밤에 힘들어 보이는 사람한테는 따뜻한 걸 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디서 배운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손이 먼저 움직였다.

케일럽은 그 물을 말없이 받았다. 그날 밤은, 조금 덜 길었다.


빌헬름과는 또 다른 결로 잘 맞았다.

둘 다 어딘가 나사가 빠진 데가 있어서, 대화가 묘하게 통했다.

피그말리온"리멤버 씨. 제가 어제 뭘 물어봤는지 기억하십니까?"

리멤버"아니. 전혀."

피그말리온"저도 사실 기억 안 납니다."

리멤버"어? 아저씨는 왜."

피그말리온"글쎄요. 저는 기억하기 싫은 걸 잘 잊어버리는 편이라. 리멤버 씨랑은 좀 다른 이유죠."

리멤버"오, 그럼 우리 둘 다 잘 까먹네. 통하는 게 있었어."

빌헬름이 옅게 웃었다. 그는 리멤버의 그 헐거운 태평함이 편했다. 자기처럼 무거운 걸 짊어진 사람 곁에선 늘 신경을 써야 했는데, 이 남자 앞에선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다 흘려버릴 테니까. 무겁게 받아주지 않아서, 오히려 가벼워지는 대화였다.


모비딕은 리멤버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직도 잘 몰랐다.

이 무뚝뚝한 리더는, 팀원을 챙기는 방식이 딱 하나였다. 밥. 그런데 리멤버는 아무리 챙겨 먹여도, 방금 먹은 걸 까먹고 또 배고파했다.

리멤버"아, 배고프다. 우리 밥 안 먹어?"

모비딕"방금 먹었잖아."

리멤버"내가? 언제?"

모비딕"…10분 전에. 두 그릇."

리멤버"에이~ 거짓말. 나 배고픈데."

모비딕은 잠깐 고민하더니, 말없이 다시 밥을 펐다. 리멤버가 진짜 배고픈 건지, 아니면 그냥 까먹은 건지 구분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이 거구의 남자는 남이 배고파 보이는 꼴을 못 견디는 사람이었다.

트러블"모비딕, 쟤 방금 먹었어. 또 주지 마."

모비딕"…혹시 진짜 배고플 수도 있잖아."

트러블"저 새끼 그렇게 하루에 여섯 끼 먹어."

리멤버는 세 번째 그릇을 아주 맛있게 비웠다. 이 팀에 온 뒤로 살이 좀 올랐다. 압주를 떠돌 땐 늘 굶었는데, 여기선 굶을 일이 없었다. 왜인지 몰라도, 이 무뚝뚝한 리더는 리멤버가 밥그릇을 비울 때마다 어딘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날 저녁, 넷은 오랜만에 같이 식탁에 앉았다.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그냥 임무가 없는 저녁이었고, 모비딕이 밥을 했고, 다들 어쩌다 같은 시간에 부엌에 모였을 뿐이다. 케일럽은 구석에서 툴툴댔고, 빌헬름은 우아하게 수저를 들었고, 리멤버는 벌써 밥을 반쯤 비웠다.

리멤버"근데 우리 넷이 이렇게 앉아 있으니까 좋네. 가족 같고."

트러블"…징그러운 소리 하지 마."

피그말리온"가족이라. 저는 좋은데요. 콩가루 같긴 하지만."

모비딕"…밥이나 먹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케일럽도 툴툴대면서 끝까지 앉아 있었고, 모비딕은 다들 그릇 비우는 걸 흐뭇하게 봤고, 빌헬름은 그 광경을 재밌다는 듯 지켜봤다.

리멤버는 이 식탁이 좋았다. 왜 좋은지는, 내일이면 또 까먹을 테지만.

다만 이상하게도, 이 팀에 온 뒤로 리멤버는 아침마다 방을 못 찾으면서도, 부엌으로는 정확히 찾아왔다. 몸이 기억하는 것 같았다. 여기 오면 따뜻한 게 있다는 걸. 머리는 다 잊어도, 몸은 자꾸 이 온기 쪽으로 걸어왔다.

리멤버"…근데 우리 언제부터 같이 살았지?"

트러블"한 달 됐어."

리멤버"와, 벌써? 나 여기 왜 이렇게 오래 있지?"

피그말리온"글쎄요. 아마 마음에 들었나 보죠. 본인도 모르게."

리멤버는 고개를 갸웃하다, 그냥 웃고 다시 밥을 펐다. 이유는 몰라도, 밥은 맛있었으니까. 그거면 충분했다.

— 다음 단편에 계속 —

IF · 종장뮤즈팀 리멤버

※ 이 이야기는 일어나지 않은 미래에 관한 것이다. 만약 그날, 그가 시설을 떠나지 않았다면.


실험 3년 차에, 연구부는 마침내 해냈다.

리멤버의 망각 에코를 안정적으로 추출하고, 정제하고, 양산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결속 상실의 기억만 골라 덜어내는 기술 — 무너지던 수많은 센티넬과 가이드가, 그 덕에 이탈하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압주로 흘러가 사라졌을 사람들이, 살아서 제 삶을 이어갔다.

하지만 백윤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가 진짜로 매달린 건, 성공이 아니라 그다음이었다.

백윤"양산은 됐습니다. 이제 이 아이 문제를 해결할 차례죠."

연구원"…부작용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그건 능력의 근본 원리라—"

백윤"근본이든 뭐든. 저 아이가 자기를 잊는 걸 계속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성공은 이미 했으니, 이제 시간이 얼마가 걸려도 상관없어요."

그리고 그의 지시가 떨어졌다. 양산 기술은 이미 확보했으니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백윤은 연구소의 방향을 틀었다. 이제 목표는 생산량이 아니라, 리멤버의 에코가 스스로를 갉아먹지 않게 하는 것 하나였다. 남을 잊게 하되, 자신은 잃지 않는 길. 그는 바빴고 자주 자리를 비웠지만, 그 연구만은 끝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다. 자기가 없는 동안에도 그 방향이 흔들리지 않도록, 사람을 붙이고 예산을 대고 방향을 잡았다.


그리고 그 길은, 결국 찾아졌다.

어느 날부터 리멤버는, 더 이상 어제를 잊지 않았다. 능력을 써도 자기 기억이 깎여 나가지 않았다. 처음으로, 그는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 온전히 기억하는 사람이 되었다.

기억을 지킬 수 있게 된 첫날, 리멤버는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어제 먹은 것도, 그제 나눈 대화도, 자기를 매일 보러 오던 사람의 얼굴도, 전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잊지 않는다는 게 이런 거였구나. 그는 조금 울었고, 그다음엔 평소처럼 실없이 웃었다.

리멤버"이사님. 저 이제 이사님 얼굴 안 까먹어요. 큰일 났네, 잔소리까지 다 기억나게 생겼어."

백윤"그게 첫마디라니. 참 너답구나."

백윤이 웃었다. 오래 짊어졌던 무언가를, 그제야 조금 내려놓은 얼굴이었다.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났다. 지금 리멤버는 뮤즈팀에 있다.

뮤즈팀. 침식으로 무너져가는 센티넬들에게 가이딩을 지원하는 부서다. 결속을 잃고 흔들리는 사람들이 매일 찾아오는 곳. 한때 그런 사람들의 기억을 지워주는 '재료'였던 리멤버가, 이제는 그들의 곁을 지키는 가이드가 되어 있었다.

그는 조금 차분해졌다. 예전처럼 방정맞게 튀지는 않았다. 자기가 한 말을 다 기억하니, 이제는 말을 조금 고르게 됐고, 사람들의 사연도 잊지 않고 담아두게 됐다. 하지만 결은 그대로였다. 여전히 실없이 웃고, 여전히 능글맞고, 여전히 어딜 가든 분위기를 풀어놓는 사람.

센티넬"…가이딩 받으러 왔는데요. 근데 저 오늘 상태가 좀 안 좋아서."

리멤버"알아요. 얼굴에 다 써 있어요. 앉으세요. 저 이래 봬도 이 바닥 베테랑이에요."

센티넬"…아프진 않죠?"

리멤버"하나도 안 아파요. 제가 좀 잘하거든요. 자, 숨 크게 쉬고."

리멤버의 가이딩은 부드러웠다. 남을 잊게 하는 능력이 아니라, 이제는 그저 곁에서 침식을 눌러주는 온기로 쓰였다. 그를 거쳐 간 센티넬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그 청록색 연기 속에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놓인다고. 무거운 걸 잠깐 내려놓게 된다고.

리멤버는 그들의 이름을 전부 기억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시 찾아오면 "오, 지난주보다 얼굴 폈네요" 하고 알아봐 주었다. 잊지 않는다는 건, 누군가에게 그렇게 다정한 일이 될 수도 있었다.


백윤은 가끔 뮤즈팀에 들렀다. 이제는 실험자와 실험체가 아니라, 그냥 오래 알고 지낸 사이로.

백윤"잘 지내니."

리멤버"보다시피요. 오늘도 세 명이나 웃겨서 보냈어요. 저 아니면 이 팀 분위기 누가 살려요."

백윤"…여전하구나."

리멤버"여전한 게 어디예요. 저 이제 안 까먹는 거, 다 이사님 덕인데. 고맙다는 말은 예전에 백 번쯤 했으니까 안 할래요. 이제 기억하니까, 두 번 말 안 해도 되잖아요."

백윤은 대답 대신 옅게 웃었다. 이 아이를 위해 그가 짊어졌던 계산과 결단들이 무엇이었든, 적어도 그 끝에 이런 얼굴이 남았다면. 그거면 되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퇴근길, 리멤버는 창가에 잠깐 섰다.

습관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는 창가를 좋아했다. 왜 좋아하는지 이제는 기억한다. 아주 어린 시절, 갇혀 있던 방에도 창이 하나 있었고, 거기 매일 새 한 마리가 왔었다는 것. 그 새에게 이름을 지어줬다는 것. 그 이름까지, 이제는 또렷이 기억한다.

많은 게 힘든 시절이었다. 그건 리멤버도 안다. 잊지 않게 된 뒤로는, 좋은 것만이 아니라 아팠던 것도 전부 남았으니까. 하지만 그는 그 기억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아팠던 날들 사이에도, 자기를 사람으로 봐준 손길이 분명히 있었다는 걸, 이제는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으니까.

그거면 충분했다. 다 기억하는 삶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리멤버"…오늘도 왔네. 너는 참 부지런하다."

창밖 어딘가에서, 작은 새 한 마리가 지저귀고 있었다. 리멤버는 그 이름을 불렀다. 아주 오래전 자기가 지어준, 이제는 결코 잊어버리지 않을 그 이름을.

그는 잊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건, 슬픈 일이 아니었다.

「Do You Remember?」 · IF 完

알렉토 추석 외전

알렉토의 첫 명절

돌아갈 곳을 잃은 자들끼리 맞이하는 첫 번째 명절.

알렉토의 첫 명절

나른한 오후. 희뿌연 인공광이 압주의 거리를 비추고 있었지만, 알렉토의 아지트는 그보다 더 짙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명절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미한 이곳에서, 시간은 그저 무의미하게 흘러갈 뿐이었다. 거실의 낡은 소파에는 리멤버가 대자로 뻗어 천장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심심함을 참지 못하고 긴 다리를 허공에 붕붕 흔들다가, 주방 쪽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팽이 냉장고 문을 열고 무언가를 찾는 중이었다. 거실 한쪽 구석, 낡은 안락의자에는 트러블이 미동도 없이 앉아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주변 공기는 유독 차갑고 날카로웠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모비딕이 묵묵히 자신의 무기를 손질하는 중이었다. 규칙적으로 천을 움직이는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리멤버"아~ 심심해. 다들 뭐해?"

그의 경쾌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미미했다. 팽은 리멤버를 힐끗 쳐다보더니 다시 냉장고 안으로 고개를 박았고, 트러블은 미동도 없었다. 오직 모비딕만이 하던 동작을 멈추고 리멤버를 쳐다봤을 뿐이다.

시선이 자기에게 쏠리자 리멤버는 기다렸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파이프 물담배를 손에 쥔 채 빙글 돌리며 그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리멤버"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알아? 추석이래, 추석. 바깥 인간들은 가족끼리 모여서 송편도 만들고 전도 부치고 그런다던데. 우리도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

그는 주방 쪽을 향해 소리쳤다.

리멤버"너는 가족 있었어? 이런 날 뭐 했냐?"

리멤버의 질문에 팽의 어깨가 순간 굳었다. 그는 냉장고 문을 거칠게 닫고는, 홱 돌아섰다. 그의 얼굴에는 노골적인 짜증이 어렸다.

팽"...그런 건 왜 물어보냐?"

리멤버"왜긴. 너 홍콩 사람이라며? 거기도 이런 거 챙기나 궁금해서 그렇지."

리멤버는 어깨를 으쓱이며 파이프를 입에 물었다. 청록빛 연기가 느릿하게 천장으로 피어올랐다. 악의라고는 한 톨도 없는, 그래서 더 얄미운 얼굴이었다.

팽은 대답 대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손에 쥔 탄산 캔을 딸깍 따더니,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팽"...챙기지. 중추절. 송편 같은 건 안 먹고, 월병 먹어."

리멤버"월병? 그게 뭔데? 맛있어?"

팽"존나 달아. 안에 연꽃씨 앙금이랑 소금에 절인 오리알 노른자 들었고."

리멤버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달다는 건지 짜다는 건지 도무지 상상이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팽은 그 반응이 조금은 만족스러웠는지 콧방귀를 뀌며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회색 꼬리가 무심하게 한 번 바닥을 쓸었다.

팽"밤 되면 등불 들고 나가. 빅토리아 공원 같은 데 사람 미어터지고. 애들은 토끼 모양 등 들고 뛰어다니고."

말끝이 조금 흐려졌다. 그는 캔을 쥔 손가락에 괜히 힘을 주었다가 풀었다. 얇은 알루미늄이 찌그러지는 소리가 작게 났다.

팽"우리 할머니는 꼭 옥상 올라가서 달 보면서 월병 잘랐어. 여덟 조각으로. 식구 수대로."

거실의 공기가 미묘하게 가라앉았다. 무기를 닦던 모비딕의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가,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가의 트러블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였지만, 창유리에 비친 그의 시선이 잠시 팽 쪽을 향했다.

리멤버는 그런 기류를 아는지 모르는지, 소파 위에서 몸을 굴려 엎드렸다. 턱을 괴고 팽을 올려다보는 금빛 눈이 반짝였다.

리멤버"여덟 조각이면 식구 엄청 많았네? 그럼 지금은? 할머니한테 연락은 해?"

순진한 질문이 허공에 걸렸다. 팽은 대답하지 않았다. 찌그러진 캔을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고는 부스스한 뒤통수를 거칠게 긁었다. 늑대 귀가 뒤로 납작하게 접혔다.

팽"바보냐? 연락을 어떻게 해. 바깥에서 난 실종된 전락자야. 할머니 집에 스펙터 들이닥치는 꼴이라도 보려고?"

리멤버"아."

그는 입에 물었던 파이프를 천천히 내리고, 드물게 할 말을 고르는 얼굴이 되었다.

그때, 규칙적이던 천 소리가 완전히 멎었다. 모비딕이 손질하던 무기를 무릎 위에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무거운 침묵이 거실 바닥에 고였다. 리멤버는 괜히 파이프 끝만 만지작거렸고, 팽은 찌그러진 캔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사이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모비딕"…우린 크리스마스 이브였어."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그에게 향했다. 모비딕은 무기를 옆으로 치우고 무릎에 팔꿈치를 괸 채, 커다란 손을 느릿하게 맞잡았다. 제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일은 드물었다.

리멤버"오, 크리스마스면 선물 받고 칠면조 먹고 그런 거?"

모비딕"칠면조는 추수감사절. 이브엔 바칼라우. 소금에 절인 대구."

리멤버가 또 얼굴을 찡그렸다. 오리알 노른자에 이어 소금 절인 생선이었다. 팽이 드물게 피식 웃었다.

모비딕"내가 자란 곳은 어촌이었어. 우리 집도 아버지가 배를 탔고. 어머니는 이브 전날부터 대구를 물에 담가 소금을 뺐다. 집 안에 온통 비린내가 뱄는데… 그게 명절 냄새였지."

그의 굵은 엄지가 다른 손등을 천천히 문질렀다.

모비딕"밥 먹고 나면 자정 미사. 굿 보야지 성당. 파도 소리 들리는 언덕 위에 있어. 난 매번 졸다가 어머니한테 옆구리를 찔렸고."

팽"…졸았다고? 상상 안 되는데."

모비딕"열 살이었으니까."

짧은 대답에 팽이 콧방귀를 뀌었다. 한결 누그러진 소리였다. 모비딕은 잠시 창밖, 인공광이 뿌옇게 번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달도, 바다도 없었다.

모비딕"항구엔 어부 동상이 있었다.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이름이 새겨진 석상. 매년 그 앞에 꽃을 뒀어. 할아버지 이름이 거기 있었거든."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 제 이름도 이제 어딘가에 새겨져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그는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임무 중 실종. 바깥 세상의 호세 페레이라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리멤버가 소파 위에서 몸을 반쯤 일으켰다. 파이프를 입술에서 떼고, 모두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리멤버"…다들 가족 보고 싶어?"

대답은 없었다. 팽은 찌그러진 캔을 손끝으로 굴렸고, 모비딕은 맞잡은 손을 풀지 않았다. 침묵은 곧 대답이었다. 리멤버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번엔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리멤버"트러블~ 너는? 너네 집은ㅡ"

트러블"꺼져."

창밖에 시선을 둔 채,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평소의 리멤버였다면 여기서 물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리멤버는 소파 쿠션을 끌어안고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눈꼬리가 축 처진채 촉촉해졌다. 누가 봐도 연기였고, 본인도 숨길 생각이 딱히 없어보였다.

리멤버"나는… 기억이 없잖아. 엄마 얼굴도, 집이 어디였는지도. 명절에 뭘 먹었는지도 몰라. 추억이란 게 하나도 없어."

그는 쿠션에 턱을 파묻고 코를 훌쩍이는 시늉까지 했다.

리멤버"그래서 그냥… 남들 이야기라도 듣고 싶었던 건데. 그것도 안 돼?"

팽이 질린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모비딕은 아무 말 없이 트러블 쪽을 보았다. 그 시선에 무슨 뜻이 담겼는지, 트러블은 등 뒤로도 알아챘다. 지금 리멤버의 연기에 속아 넘어간 것은 모비딕 뿐인듯 했다.

트러블"…씨발, 진짜."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창유리에 뿌옇게 김이 서렸다가 사라졌다. 그는 끝내 돌아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트러블"추수감사절. 아이오와 촌구석이었어. 옥수수밭밖에 없는 동네."

리멤버가 쿠션에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방금 전의 처량함은 흔적도 없어졌다.

트러블"아버지는 공장에 다녔고, 술만 마시면 조용해지는 인간이었어. 그게 차라리 나았지. 엄마는 매일 새벽 교회에 나갔고 추수감사절이라고 예외는 없었어. 다섯 시부터 교회에 들고 갈 칠면조를 구웠지. 매년 태웠어. 겉은 시커멓고 속은 퍽퍽하고."

팽"…맛없었겠네."

트러블"존나 맛없었지."

짧게, 거의 웃음에 가까운 숨이 새어 나왔다. 그는 창틀에 손가락을 올리고 무의미하게 두드렸다.

어색한 침묵이 거실 바닥에 다시 내려앉으려던 찰나였다.

쿵!

현관 쪽에서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무언가 무거운 것이 문짝에 부딪힌 소리였다. 팽의 늑대 귀가 반사적으로 쫑긋 섰고, 모비딕의 몸이 소파에서 반쯤 일어났다. 트러블의 손이 코트 안쪽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리고 곧, 문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발로 차지 말라고. 문 부서지면 네가 고칠 거야?'

'손이 없는데 어떡해요, 자드 씨!'

모비딕이 다시 소파에 몸을 묻었다. 트러블은 코트에서 손을 빼고 혀를 찼다. 팽이 한숨을 쉬며 현관으로 걸어가 문을 열어젖혔다.

문이 열리자마자 종이봉투의 산이 거실로 밀려 들어왔다. 정확히는, 종이봉투를 양팔 가득 끌어안은 하트가. 봉투 위로 파 끝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고, 틈새로 밀가루 포대와 계란판이 보였다. 갈색 머리칼은 땀에 젖어 이마에 들러붙어 있었다.

하트"다들 있었네요! 다행이다!"

봉투 너머로 주근깨 박힌 얼굴이 환하게 웃었다. 팽이 반사적으로 무너질 듯한 봉투 두 개를 받아 들었다. 생각보다 무거웠는지 미간이 찌푸려졌다.

팽"…이게 다 뭐야? 전쟁이라도 난 거야?"

하트"오늘 추석이잖아요! 전도 부치고, 송편도 빚고. 월병 재료도 찾아봤는데 오리알은 도저히 없더라고요."

그 뒤로 빌헬름이 들어섰다. 양손에 봉투를 네 개씩, 팔뚝에도 두 개를 더 걸고 있었다. 손목이 봉지 손잡이에 눌려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는 봉투들을 식탁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고, 오른팔을 천천히 돌려 보았다. 어깨 쪽에서 우드득, 불길한 소리가 났다.

피그말리온"팔이 빠질 것 같군요.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요. 지난번에 꿰맨 실이 좀 헐거웠거든요."

그는 온화한 얼굴로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오직 리멤버만이 소파에서 킥킥거렸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톡신은 빈손이었다. 시안빛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거실을 한 번 훑어보더니, 코를 킁킁거렸다.

톡신"…뭐야. 공기가 왜 이래. 누구 초상 치렀냐?"

톡신의 질문에 누구 하나 입을 열기도 전이었다. 하트가 식탁 위에 봉투를 탁 내려놓더니 두 손을 짝, 맞부딪쳤다.

하트"자, 자! 초상은 무슨 초상이에요. 시간 없어요! 전부터 부치고, 송편 소도 볶아야 하고… 아, 녹두도 치대야 하는구나!"

그는 봉투를 하나씩 뒤집어 내용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애호박, 동태포, 두부, 다진 고기, 깻잎, 참기름 병, 쌀가루 포대가 순식간에 식탁을 뒤덮었다. 굴러떨어지는 양파 하나를 모비딕이 반사적으로 받아 들었다.

하트"호세 씨, 그거 냉장고 채소 칸에요. 명월 씨는 계란판 좀. 깨지면 안 돼요! 케일럽 씨는 저기 밀가루랑 쌀가루 찬장 위에 올려주시고요."

트러블"…내가 왜."

하트"빨리!"

드물게 단호한 하트의 재촉에 트러블은 무언가 욕을 삼킨 듯 턱에 힘을 주었다가, 결국 코트 소매를 걷고 쌀가루 포대를 들어 올렸다. 찬장 문을 여는 손길이 불필요하게 거칠었다.

팽은 계란판을 들고 냉장고 앞에서 잠시 멈칫했다. 안에 뭐가 들어갈 자리가 있나 가늠하는 눈치였다. 그는 제 이름이 적힌 푸딩 빈 용기를 발견하고 표정이 험악해졌지만, 계란판을 쥔 손 때문에 아무것도 던질 수 없었다.

팽"…이거 먹은 새끼 누구냐."

대답은 없었다. 소파 쪽에서 리멤버가 휘파람을 불었다.

리멤버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 옆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정리를 돕는다기보다는, 쏟아진 재료들을 하나씩 집어 들어 불빛에 비춰보는 중이었다. 동태포 포장을 뒤집어 보더니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았다.

리멤버"우와, 이거 생선이야? 납작한데? 모비딕이 말한 대구 같은 거야?"

모비딕"그건 명태."

모비딕은 냉장고에 양파를 넣으며 짧게 답했다. 그 손에는 어느새 애호박 두 개와 두부 한 모까지 들려 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리멤버는 이번엔 깻잎 묶음을 집어 들어 부채처럼 흔들었다. 향이 퍼지자 그의 금빛 눈이 가늘어졌다.

리멤버"이건 무슨 맛이야? 먹어봐도 돼?"

하트"생으로 드시면 좀 쓸 거예요. 그건 고기 소 넣어서 부칠 거라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리멤버는 깻잎 한 장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곧 얼굴 전체를 구겼다.

리멤버"우웩."

톡신은 식탁 위 난장판을 한참 노려보다가, 길고 노골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리멤버의 손에서 반쯤 씹다 만 깻잎 묶음을 낚아챘다.

톡신"생걸 처먹냐, 미친놈아. 비켜. 걸리적거려."

그는 리멤버의 엉덩이를 발로 툭 밀어내고 식탁 앞에 섰다. 재료를 가르는 손놀림이 수술 도구를 정리하듯 정확했다. 상할 것, 오래 둘 것, 당장 쓸 것. 동태포는 냉장실로, 다진 고기는 볼에 담아 식탁 한가운데로. 순식간에 식탁 위에 질서가 생겼다.

그렇게 삼십 분쯤 지나자 아지트는 제법 부엌다운 꼴이 되었다. 모비딕은 싱크대 앞에서 불린 녹두를 치댔고, 트러블은 도마 위에서 애호박을 썰었다. 총질과 달리 칼질에는 소질이 없는지 애호박의 두께는 불규칙했다. 팽은 계란을 깨다 껍데기가 들어가자 손가락으로 건져내며 욕을 중얼거렸다. 빌헬름은 헐거운 어깨로 두부를 으깼다. 리멤버는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때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핸섬"긴급 상황이라며! 어디야, 누가 쓰러졌어? 이형? 개장수?"

얼굴 없는 검은 머리가 문틈으로 쑥 들어왔다. 숨이 찬 듯 어깨가 들썩였다. 그리고 그 텅 빈 얼굴이 천천히 거실을 훑었다. 밀가루가 흩날리는 식탁. 앞치마를 두른 하트. 녹두를 치대는 거구의 모비딕. 애호박을 써는 트러블.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핸섬"…아. 나 잘못 왔네. 옆집인가 봐."

그는 아무렇지 않게 몸을 돌렸다. 발끝부터 형체가 희미하게 번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고리에 손이 닿기도 전에, 잿빛 손이 그의 뒷덜미를 정확히 움켜쥐었다. 반쯤 사라지던 몸이 억지로 다시 윤곽을 드러냈다.

톡신"어딜 튀려고."

핸섬"악! 아니, 톡신! 들어봐. 이 몸은 이런 노동에 쓰이기엔 너무 아까운 인재라고. 왕년엔 이런 거 나한테 시킬 사람이 없었어, 알아?"

톡신"좋은 말 할 때 앉아라."

톡신은 그를 질질 끌고 와 식탁 의자에 내리꽂았다. 하트가 기다렸다는 듯 쌀가루 반죽 한 덩이를 그 앞에 턱 내려놓았다.

하트"와주셨네요, 디에고 씨! 송편 반죽 담당이에요!"

핸섬"…긴급 상황이 이거였어?"

하트"네! 일손이 너무 부족했거든요."

핸섬은 텅 빈 얼굴로 반죽을 내려다보았다. 표정은 없었지만, 어깨가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맞은편에서 리멤버가 턱을 괸 채 킥킥 웃었다.

리멤버"환영해~ 도망자 동지."

똑똑.

현관 쪽에서 이번엔 제법 예의 바른 노크 소리가 울렸다. 방금 전 핸섬의 요란한 등장과 비교하면 오히려 낯설 만큼 점잖은 소리였다. 식탁에 앉은 모두의 시선이 동시에 문으로 향했다.

팽"…또 누구야. 여기가 무슨 잔칫집인줄 알아?"

팽이 계란 껍데기 묻은 손을 바지에 대충 문지르며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앞선 쪽은 화려한 녹색 창파오 자락을 들뜬 듯 살랑이며 발끝으로 서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려는 듯 고개를 기웃거리는 흑안이 반짝였다.

영하"오호라, 과연 맞았구나! 골목 어귀에서부터 기름 냄새, 사람 냄새가 폴폴 나길래 필시 재미난 일을 벌이는 줄 알았지."

그 한 걸음 뒤, 붉은 창파오를 걸친 우하가 문틀에 어깨를 기대고 서 있었다. 선글라스 너머 눈꺼풀이 반쯤 내려앉아 있었다. 누가 봐도 끌려온 얼굴이었다. 그는 접힌 부채로 목덜미를 느릿하게 긁었다.

우하"…난 말렸다. 영감이 오고 싶다고 우긴 거야."

영하"아이, 우하야. 명절 아니더냐. 방구석에 틀어박혀 거울만 들여다보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느냐?"

영하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팽의 옆구리를 스르륵 빠져나가 거실로 들어섰다. 팽이 뭐라 하기도 전이었다. 그는 식탁 앞에 서서 난장판을 휘 둘러보더니, 손뼉을 짝 쳤다.

영하"허허, 이게 다 무엇이냐! 오래 살고 볼 일이로다. 전락자들이 모여 앉아 송편을 빚는 꼴을 다 보다니."

그 말에 핸섬이 반죽 덩이를 쥔 채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핸섬"영감님! 잘 오셨어요. 딱 한 자리 비는데, 여기 앉으시면 되겠네. 전 이제 그만 가볼—"

톡신"앉아."

핸섭"넵."

톡신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핸섬의 엉덩이가 다시 의자에 붙었다.

우하는 그제야 마지못해 문턱을 넘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와 거실 한가운데 멈춰 서더니, 트러블이 썰어놓은 애호박 더미를 내려다보았다. 두께가 제각각인 조각들이 도마 위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우하"…이건 누가 썰었어."

트러블"왜."

우하는 대답 대신 소매를 걷었다. 트러블의 손에서 칼을 가져가 도마 앞에 섰다. 탁, 탁, 탁. 일정한 간격으로 칼날이 떨어졌다. 애호박이 자로 잰 듯 균일하게 떨어져 나갔다.

트러블은 빈손으로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짧게 욕을 씹어 삼켰다. 하트가 눈을 반짝였다.

하트"우하 씨, 칼질 담당 해주실래요?"


한 시간쯤 지나자, 식탁 한가운데 놓인 커다란 쟁반 위에 송편이 하나둘 쌓이기 시작했다. 하트가 손에 묻은 쌀가루를 털며 환하게 웃었다.

하트"자, 이쯤에서 다들 만든 거 한번 봐요! 찌기 전에 품평회!"

가장 먼저 쟁반 앞에 놓인 건 모비딕의 몫이었다. 여섯 개. 그중 온전한 건 하나도 없었다. 전부 옆구리가 터져 깨 소가 줄줄 새어 나와 있었다. 모비딕은 제 두꺼운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반죽을 오므릴 때마다 조금만 힘을 줘도 속이 터져 나왔다.

모비딕"…반죽이 약해."

톡신"네 손이 무식한 거고."

모비딕은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터진 송편 하나를 다시 꾹꾹 여미려다, 이번엔 아예 반으로 갈라뜨렸다. 거실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다음은 트러블이었다. 그는 반죽을 쥔 채 내내 욕을 중얼거렸다.

트러블"이딴 걸 왜 하는 건데. 씨발, 먹으면 다 똑같잖아."

그러면서도 손은 쉬지 않았다. 이마에 주름이 잡힐 만큼 집중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결과물은 두께도 크기도 제각각이었다. 어떤 건 돌멩이처럼 딱딱하게 뭉쳐 있었고, 어떤 건 납작하게 짓눌려 있었다. 리멤버가 하나를 집어 들고 고개를 갸웃했다.

리멤버"이거 만두야? 아니면 혹시 수류탄?"

트러블"내려놔. 쏴버리기 전에."

팽의 차례가 오자 분위기가 조금 바뀌었다. 그의 송편은 반달 모양이 제법 가지런했다. 가장자리도 고르게 눌려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쏠리자 팽은 괜히 뒷머리를 긁으며 시선을 피했다. 꼬리가 바닥을 한 번 탁 쳤다.

팽"…할머니가 만두 빚는 거 옆에서 많이 도왔어. 그게 다야."

하트"와, 명월 씨 진짜 잘하시네요!"

칭찬에 팽의 귀 끝이 미세하게 붉어졌다.

그리고 리멤버.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애초에 반죽을 만지기는 했는지조차 의문이었다. 그런데 그가 슬며시 내민 접시 위의 송편들은 놀랍도록 매끈했다. 이음새 하나 없이 깔끔했다. 문제는 모양이었다. 고래, 늑대 머리, 해골, 하트 모양,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촉수 달린 무언가.

리멤버"짜잔~ 이건 모비딕, 이건 팽. 이건 관리자 아저씨야."

촉수 달린 송편을 가리키며 그는 해맑게 웃었다. 모비딕은 제 얼굴이라는 고래 송편을 오래 내려다보았다. 우하가 칼질을 멈추고 한마디 던졌다.

우하"…관리자한테 보여주지 마라."

품평회는 계속되었다. 다음 차례는 빌헬름이었다.

그는 접시를 두 손으로 공손히 내밀었다. 위에 놓인 것들은 송편이라기보다 반죽 덩어리에 가까웠다. 이음새는 벌어져 있었고, 어떤 건 소가 아예 바깥에 붙어 있었다. 반죽 표면에는 지나치게 깊은 손자국이 파여 있었다.

피그말리온"손끝에 감각이 거의 없어서요. 힘 조절이 어렵더군요. 몇 번 꿰매다 보면 신경이 먼저 포기하거든요."

그는 태연하게 제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하트가 입을 열었다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도로 다물었다.

그 하트의 쟁반은 이미 절반이 차 있었다. 모두가 한 개를 빚는 동안 그는 다섯 개를 만들었다. 반죽을 떼고, 굴리고, 소를 넣고, 오므리고, 누르고. 손이 멈추는 순간이 없었다. 크기도 모양도 전부 똑같았다.

팽"…저거 사람 맞냐. 공장 기계 같은데."

하트"뮤즈 시절에 봉사활동으로 많이 해봤거든요."

그 옆자리 톡신의 몫은 텅 비어 있었다. 정확히는, 반쯤 빚다 만 반죽 하나가 짓눌린 채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는 손에 묻은 반죽을 행주에 거칠게 문질렀다.

톡신"안 해. 손에 들러붙고 지랄이야. 차라리 봉합을 하지."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꼈다. 아무도 뭐라 하지 못했다.

우하의 앞에는 단정한 송편이 줄지어 있었다. 칼질하던 틈틈이 빚은 것치고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문제는 그 옆이었다.

영하"허허, 이 늙은이가 오랜만에 솜씨 좀 부려보았느니라."

영하가 자랑스레 내민 송편들은 한쪽으로 기울었거나, 끝이 뾰족하게 비틀려 있었다. 우하가 선글라스 너머로 그것들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우하"…영감, 됐어. 내가 할 테니까 저기 앉아 있어."

영하"아니, 우하야. 이 정도면 꽤ㅡ"

우하"쉬어."

영하는 입술을 삐죽이며 물러났지만, 그 얼굴에는 어딘가 흐뭇한 기색이 스쳤다.

마지막은 핸섬이었다. 끌려와 앉았던 그의 앞에는 놀랍게도 하트의 것과 견줄 만큼 완벽한 송편들이 놓여 있었다. 가장자리에 솔잎 무늬까지 섬세하게 눌러 넣은 채였다.

리멤버"…뭐야, 이거 진짜 네가 만든 거야?"

핸섬"당연하지. 원래 미남은 이런 것도 잘하는 법이거든."

텅 빈 얼굴이 뿌듯하게 치켜들렸다. 톡신이 짧게 코웃음을 쳤다.

톡신"그럼 뭐해. 얼굴이 없잖아."

핸섬"그러니까 손이라도 남은 거지!"

식탁 위로 웃음 비슷한 것이 번졌다. 모비딕의 터진 송편 옆에서, 트러블조차 입꼬리를 한 번 비틀었다.

마지막 송편이 쟁반 위에 올라갈 즈음이었다. 식탁 위 형광등이 한 번, 기묘하게 깜빡였다.

거실 한가운데 허공이 소리 없이 갈라졌다. 먹물을 푼 듯한 틈새에서 짙은 심해의 냄새가 번졌다. 틈 너머에서 흰 구두 끝이 먼저 나왔다. 이어 새하얀 정장 자락,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흑보라빛 뱀 문신, 그리고 라벤더빛과 검은빛이 엇갈린 눈동자.

레비 라자루스는 서두르는 기색 하나 없이 균열을 빠져나왔다. 그가 손끝을 가볍게 튕기자 뒤편의 틈이 조용히 닫혔다. 그는 기름 냄새와 쌀가루가 흩날리는 공기를 천천히 들이마셨다.

관리자"웬일로 우리 사냥개들이 나를 초대해주나 해서 와봤더니. 재밌는 걸 만들었네, 달링들."

톡신이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고개만 삐딱하게 돌렸다. 팔짱 낀 팔뚝에 힘줄이 불거졌다.

톡신"왜 이제 와. 부른 게 언젠데. 다 끝났거든?"

관리자"달링, 내가 왜 이런 걸 해야 하지?"

레비는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느릿하게 올렸다. 그러고는 누가 권하지도 않았는데 식탁 상석의 빈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흰 정장 소매에 쌀가루가 묻을까, 손목을 살짝 들어 올리는 동작마저 우아했다. 다리를 꼬고 턱을 괴는 모양새가 제 집 응접실이라도 되는 듯했다.

관리자"노동은 대가를 받는 사람이 하는 거야. 난 대가를 주는 쪽이고. …뭐, 먹는 건 해줄 수 있지."

톡신이 입을 열었다가, 무언가 욕을 한 무더기 삼키는 얼굴로 다시 다물었다. 핸섬이 슬그머니 형체를 되찾으며 속삭였다.

핸섬"…저 양반은 튀어도 안 잡네."

톡신"닥쳐."

레비의 시선이 식탁 위를 느긋하게 훑었다. 하트의 공장제 같은 송편들, 핸섬의 솔잎 무늬, 우하의 단정한 줄. 그의 입꼬리가 흡족하게 올라갔다.

관리자"그래도 제법이구나. 모양들이 꽤 예ㅃ—"

말이 멈췄다.

그의 눈길이 쟁반 한쪽 끝에 닿아 있었다. 옆구리가 터져 깨 소를 질질 흘리는 여섯 개의 덩어리. 그중 하나는 반으로 쪼개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바로 옆, 소가 겉면에 붙은 채 손자국이 깊게 파인, 송편이라 부르기엔 양심에 걸리는 무언가들.

레비는 그것들을 오래, 아주 오래 내려다보았다. 눈동자가 한 번 천천히 깜빡였다.

모비딕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묵묵히 그를 마주 보았다. 빌헬름은 온화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마치 감상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관리자"……."

레비는 괴었던 턱을 풀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선을 거두어 우하 쪽으로 돌렸다.

관리자"찐 건 언제 나오지?"

하트는 레비의 물음에 대답하기도 전에 이미 쟁반을 번쩍 들어 올리고 있었다.

하트"지금 넣을 거예요! 한 이십 분이면 돼요."

주방 쪽 가스레인지 위에서는 커다란 찜기가 하얀 김을 뿜고 있었다. 하트는 뚜껑을 열고 젖은 면포 위에 솔잎을 한 겹 깔았다. 그 위로 송편을 하나씩 올렸다. 하트의 것, 핸섬의 것, 우하의 것, 팽의 것은 가지런히. 리멤버의 고래와 촉수는 한쪽 구석에. 트러블의 수류탄들은 그 옆에. 그리고 모비딕과 빌헬름의 것은, 잠시 망설이다가 가장 뜨거운 가운데 자리에 조심스레 올려두었다.

뚜껑이 닫히자 솔잎 향이 거실까지 번졌다. 소파에 드러누워 있던 리멤버가 코를 킁킁거렸다.

하트는 쉴 틈도 없이 옆 화구로 옮겨 갔다. 넓적한 프라이팬 위에서 동태전과 애호박전이 지글지글 익어가고 있었다. 우하가 썰어둔 균일한 애호박이 노란 계란옷을 입고 가장자리부터 노릇하게 부풀었다. 하트는 뒤집개로 하나를 뒤집어 보고,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편 냄비에서는 탕국이 뭉근하게 끓고 있었다. 무와 소고기, 두부가 맑은 국물 속에서 천천히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하트는 국자로 국물을 떠 작은 종지에 옮긴 뒤, 후후 불어 한 모금 머금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곧, 얼굴 전체에 햇살 같은 웃음이 번졌다.

하트"…됐다. 딱 좋아요."

상석의 레비는 턱을 괸 채 그 광경을 나른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색의 눈동자가 김 서린 주방과, 부산스러운 사람들과, 식탁 위에 흩어진 쌀가루를 차례로 훑었다. 그의 입가에 무언가 알 수 없는 미소가 걸렸다가 사라졌다.

관리자"아가, 전 한 접시 먼저 내오렴. 기다리는 것도 노동이거든."

레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소파 위의 리멤버와 식탁 옆의 팽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정확히 마주쳤다.

말은 없었다. 필요하지도 않았다. 리멤버는 입꼬리를 한쪽만 비죽 끌어내렸고, 팽은 눈을 가늘게 뜨며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아무것도 안 해놓고 제일 먼저 처먹겠다는 저 양반. 평소엔 서로 투닥거리기 바쁜 둘이 이토록 완벽하게 뜻을 같이한 건 드문 일이었다.

그 무언의 교신을 눈치챘는지 못 챘는지, 하트는 이미 갓 부친 전을 접시에 담아 레비 앞에 내려놓고 있었다. 동태전 세 조각, 애호박전 두 조각, 그리고 깻잎전 하나. 기름기가 아직 반짝였다.

레비는 젓가락을 들어 동태전 하나를 집었다. 흰 정장 소매에 기름 한 방울 튀지 않게, 손목을 들어 올리는 각도까지 완벽했다. 천천히 한 입. 그리고 느릿하게 씹었다.

식탁 위로 기묘한 긴장이 흘렀다. 하트는 앞치마 자락을 두 손으로 꼭 쥐고 있었다.

관리자"……음."

레비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색의 눈동자가 하트에게 향했다.

관리자"간이 좋구나, 아가. 기름도 깨끗하고. 이 도시에서 이 정도 맛을 내는 손은 흔치 않지."

하트"정말요? 다행이다…!"

하트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레비는 그 반응이 퍽 흡족한 듯 입꼬리를 올리더니, 허공에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탁자 위 공기가 물결처럼 일렁이며 작은 틈이 열렸다. 그 안에서 그는 무언가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짙은 흑청색 유리병이었다. 병목에는 은실로 엮은 봉인이 감겨 있었고, 라벨에는 읽을 수 없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병 안의 액체가 불빛을 받아 심해처럼 깊은 푸른빛으로 일렁였다.

관리자"빈손으로 올 만큼 내가 무례하진 않아, 달링들. 균열 너머 손님 하나가 빚을 갚겠다고 두고 간 거야. 백 년은 묵었다던가. 이 도시에 딱 세 병뿐이지."

거실이 잠시 조용해졌다. 트러블이 들고 있던 행주를 내려놓았다. 톡신의 역안이 가늘어졌고, 핸섬은 텅 빈 얼굴로 병 쪽을 향해 몸을 쭉 뺐다. 모비딕조차 녹두 반죽을 치대던 손을 멈췄다.

그리고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불과 삼십 초 전까지 레비를 향해 입꼬리를 비틀던 리멤버였다.

리멤버"관리자 님 최고!"

그는 소파에서 튕기듯 일어나 식탁으로 달려왔다. 금빛 눈이 병을 향해 반짝였다. 방금 전의 떨떠름한 기색은 흔적도 없었다.

리멤버"역시 우리 관리자 님은 뭘 좀 아신다니까~ 멋있어! 우아해! 정장도 완전 잘 어울려!"

팽은 반쯤 벌어진 입을 한참 다물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같은 편이라 믿었던 동맹이, 지금은 레비의 흰 정장 소매 곁에 들러붙어 병을 향해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팽"…야. 너 자존심도 없냐?"

리멤버"자존심? 그게 뭔데? 먹는 거야?"

리멤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꾸했다. 해맑은 목소리였다. 팽은 부스스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늑대 귀가 뒤로 납작 접혔다가, 병 쪽으로 슬그머니 다시 섰다. 코끝이 저도 모르게 킁, 움직였다. 병뚜껑도 따지 않았는데 짙은 바다 냄새 같은 것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팽"…씨. 배신자 새끼."

그 사이 하트는 앞치마 끈을 풀지도 않은 채 이미 부엌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하트"잔! 잔 준비할게요! 우리 잔 몇 개 있었지… 호세 씨, 찬장 제일 위 칸 좀 열어주세요!"

모비딕이 녹두 반죽 묻은 손을 행주에 닦고 느릿하게 일어났다. 팔을 뻗어 찬장 맨 위 칸을 열자, 제각각인 잔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빠진 머그, 소주잔 두 개, 어디서 주워 온 듯한 와인잔 하나, 그리고 뚜껑 잃은 잼 병. 하트가 그것들을 하나씩 받아 들며 잠시 난감한 얼굴을 했다.

하트"…백 년 된 술인데 잼 병은 좀 그렇죠?"

모비딕"마시면 똑같아."

식탁 쪽에서는 톡신이 팔짱을 풀지 않은 채 병과 레비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역안의 동공이 가늘게 좁아졌다. 검체를 훑는 눈빛이었다.

톡신"네가 웬일이냐. 공짜로 뭘 내놓은 적이 없잖아."

레비는 대답 대신 턱을 괸 채 느릿하게 웃었다. 이색의 눈동자가 가늘게 휘었다.

관리자"섭섭하게? 나도 이 정도 인심은 쓸 줄 알아."

톡신"인심 좋아하네. 나중에 청구서 날아오는 거 아니고?"

관리자"대가는 이미 받았어."

그는 젓가락으로 남은 애호박전을 가볍게 집어 들어 보였다. 그리고 한 입, 우아하게 베어 물었다.

관리자"이걸로."

톡신은 한참 그를 노려보다가 혀를 찼다. 믿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그 이상 따지지도 않았다. 식탁 끝에서 영하가 소매로 입을 가린 채 조용히 웃었다.


식사가 끝난 식탁 위는 전쟁이 지나간 자리 같았다. 기름 묻은 접시와 비어 가는 탕국 냄비, 솔잎이 들러붙은 찜기. 그리고 한가운데,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한 흑청색 유리병.

리멤버는 그 식탁 한쪽을 팔로 쓸어 치우고 너덜너덜한 화투패를 촤르륵 펼쳤다. 모서리가 닳고 몇 장은 물에 불었다 마른 흔적이 있었다.

리멤버"자, 잘 들어~ 이건 '압주 고스톱'이야. 일단 이 빨간 띠 세 개 모으면 '청단'."

우하"…그건 홍단이다."

리멤버"압주에선 청단이야. 그리고 이 새 다섯 마리 그려진 거, 이거 모으면 '모비딕'."

팽"고도리잖아, 미친놈아. 새가 무슨 고래야."

리멤버"크니까 고래지! 그리고 이 달 그려진 패를 내면, 무조건 옆 사람한테 전 한 조각 먹여줘야 해. 추석이니까."

핸섬이 텅 빈 얼굴을 들이밀며 손을 번쩍 들었다.

핸섬"이의 있음! 난 입이 없는데?"

리멤버"그럼 벌칙으로 머리에 붙여."

영하가 소매로 입을 가리고 깔깔 웃었다. 톡신은 이미 반쯤 취한 눈으로 패 하나를 뒤집어 보더니 혀를 찼다. 레비만이 잼 병에 담긴 술을 우아하게 기울이며, 규칙이 바뀔 때마다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올렸다.


아지트 문 밖은 거실의 소란이 거짓말 같을 만큼 조용했다.

모비딕은 녹슨 난간에 팔을 걸친 채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아래로는 수직으로 쌓인 슬럼의 불빛들이 끝도 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네온이 번져 보랏빛으로 뭉개진 하늘에는, 역시 달이 없었다.

라이터 불꽃이 한 번 튀었다가 꺼졌다. 두 번째에야 겨우 붙었다. 연기가 느릿하게 흩어졌다.

등 뒤에서 문이 삐걱 열렸다. 발소리만으로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트러블은 아무 말 없이 걸어와 한 걸음 떨어진 난간에 등을 기댔다. 코트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손을 내밀었다.

트러블"…한 대."

모비딕은 돌아보지도 않고 담뱃갑을 내밀었다. 트러블이 한 개비를 뽑아 물자, 커다란 손이 라이터를 켜 그 앞에 가져갔다. 불꽃이 흉터 진 얼굴을 잠깐 붉게 비췄다.

한동안 둘 다 말이 없었다. 안쪽에서 팽이 "그게 왜 내 패야!" 하고 고함치는 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트러블"…시끄러워 죽겠네."

모비딕"그래서 나왔어?"

트러블"……."

트러블은 대답 대신 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손가락 사이에서 담배가 미세하게 떨렸다.

안쪽에서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하트의 목소리였다. 누군가를 말리는 것 같기도, 같이 떠드는 것 같기도 한 들뜬 목소리. 이어 리멤버의 "그건 압주 룰로 무효야!"와 톡신의 욕설이 뒤엉켜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트러블은 난간에 기댄 채 그 소리를 들으며 담배를 깊게 빨았다. 불씨가 붉게 타들어 갔다.

트러블"…하트 녀석이 오고 나서 여기 꼴이 말이 아니야."

모비딕이 고개를 조금 돌렸다.

트러블"냉장고엔 반찬통이 쌓이고, 소파엔 담요가 생기고. 아침마다 밥 먹으라고 문 두드리고. 씨발, 여기가 무슨 가정집도 아니고."

말은 거칠었지만, 목소리에 날이 서 있지 않았다. 담배를 든 손가락이 더는 떨리지 않았다. 그는 그걸 스스로도 아는지, 괜히 연기를 세게 뱉어냈다.

트러블"…예전엔 조용했잖아. 다들 각자 방에 처박혀서. 임무 가고, 돌아오고, 끝."

모비딕"그랬지."

모비딕은 짧게 긍정했다. 난간 너머 가라앉은 불빛들을 내려다보는 갈색 눈이 잠시 먼 곳을 향했다. 담뱃재가 길게 매달렸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모비딕"…옛날 생각 나네."

트러블의 손이 멈췄다.

옛날. 그 한 마디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임무가 끝나면 누군가는 꼭 배달 음식을 잔뜩 시켜 놓았고, 누군가는 그걸 보고 가시돋친 말을 쏟아내면서도 제일 먼저 젓가락을 들었다. 누군가는 규정을 들먹이며 과음을 말렸고, 장갑 낀 손으로 조용히 모두의 잔을 채워주던 사람도 있었다.

둘 중 누구도 그 이름들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트러블"……."

트러블은 담배를 입에서 떼고 필터를 내려다보았다. 흉터 진 턱에 힘이 들어갔다가 풀렸다. 그 곳을 떠나던 날, 제 손에 쓰러지던 베인의 배신감에 일그러지던 검은 눈이 떠올랐다. 그는 그 기억을 연기와 함께 밀어냈다.

트러블"…늙은 거야? 답지 않게 웬 추억 감상인데."

모비딕"네 말대로 늙었나보지."

그 순간 안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하트"호세 씨! 케일럽 씨! 송편 남은 거 드셔야 해요, 식어요!"

트러블이 욕을 짧게 씹었다. 그리고 반도 안 탄 담배를 난간에 비벼 껐다. 모비딕도 따라 불을 껐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보지 않은 채 서 있다가, 동시에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거실로 돌아오자 식탁 위는 이미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화투패가 사방에 흩어져 있었고, 핸섬의 텅 빈 얼굴 한가운데에는 애호박전 한 조각이 벌칙처럼 붙어 있었다. 팽은 리멤버의 멱살을 반쯤 잡은 채 씩씩거리고 있었고, 리멤버는 그 와중에도 깔깔 웃으며 패 한 장을 흔들었다.

리멤버"봐봐, 달 패야! 규칙대로 전 먹여줘야지~ 팽, 아~ 해."

팽"꺼져. 네 손으로 주는 건 안 먹어!!!"

그러면서도 팽의 꼬리는 바닥을 느릿하게 쓸고 있었다. 리멤버가 전을 들이밀자 팽은 인상을 잔뜩 구긴 채, 결국 한 입에 받아먹었다.

하트는 모비딕과 트러블 앞에 따뜻하게 데운 송편 접시를 내려놓았다. 가운데에 놓였던 기괴한 모양의 송편 두 개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모비딕은 그중 제 것으로 보이는 덩어리를 집어 한 입에 넣었다. 속이 터져 깨가 흘러나왔다.

모비딕"…맛은 괜찮네."

트러블"모양이 문제지, 씨발."

트러블은 투덜거리면서도 자기 몫의 수류탄 모양 송편을 집었다. 하트가 그 모습을 보며 앞치마를 쥔 채 웃었다.

상석의 레비는 마지막 한 모금을 비운 잼 병을 내려놓고 천천히 일어났다. 흰 정장 자락에 쌀가루 한 점이 묻어 있었지만, 그는 털어내지 않았다.

관리자"즐거웠어, 달링들. 다음 명절에도 초대해 주려나?"

톡신"술 들고 오면."

레비는 느릿하게 웃으며 공기의 틈 속으로 사라졌다. 영하와 우하가 그 뒤를 따라 인사를 건넸고, 핸섬은 이마에 전을 붙인 채 손을 흔들며 나갔다.

밤이 깊어지자 소란은 하나둘 잦아들었다. 리멤버는 화투패를 가슴에 안은 채 소파에서 잠들었고, 팽은 그 옆 바닥에서 꼬리를 말고 웅크렸다. 빌헬름은 조용히 담요 두 장을 가져와 둘 위에 덮어 주었다. 하트는 마지막 접시를 헹구다 말고 거실을 돌아보았다.

달은 없었다. 이 도시의 하늘에는 한 번도 뜬 적이 없었다.

그래도 오늘 밤의 아지트는, 어딘가 둥글고 환했다.

하트"…다들, 좋은 추석 보내세요."

대답은 없었다. 다만 어둠 속 어딘가에서, 누군가 작게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알렉토의 첫 명절」 · 完

팽 과거 외전 1

태양을 삼킨
늑대

어린 늑대가 가족의 품을 떠나 새로운 가족을 만나기까지.

태양을 삼킨 늑대 (상)

태양을 삼킨 늑대 (상) 도입 삽화

오후 네 시 반, 삼수이포의 하늘은 빨래가 다 가리고 있었다. 낡은 아파트 창마다 대나무 장대가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었고, 거기 걸린 셔츠며 러닝셔츠며 누구 건지 모를 꽃무늬 속옷까지 눅눅한 바람에 느릿느릿 흔들렸다. 저래서야 마를 리가 없는데, 동네 사람들은 몇십 년째 저렇게 널었다.

명월은 교복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어 헤친 채 골목을 걸었다. 한쪽 어깨에 걸친 가방은 교과서보다 테이핑 붕대랑 물병 때문에 더 묵직했다. 주먹을 쥐었다 펼 때마다 손가락 마디가 따끔거렸다. 어제 샌드백을 너무 오래 쳐서 까진 자리가 아직 벌겋게 남아 있었는데, 관장은 그걸 보고 붕대도 제대로 못 감느냐고 뒤통수를 한 대 쳤었다.

차찬텡 앞을 지나는데 주인아저씨가 유리문 밖으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차찬텡 주인"어어, 명월이! 또 막내 데리러 가냐?"

서명월"...예."

차찬텡 주인"형이 착하다니까, 착해. 이거 하나 가져가. 동생 주고."

에그타르트 두 개가 담긴 비닐봉지가 불쑥 코앞에 들이밀어졌다. 명월은 괜히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고개를 까딱 숙이고 받아 들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는 했는데, 입 안에서 웅얼거리다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아저씨는 그래도 만족스럽다는 듯 껄껄 웃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유치원 앞은 벌써 할머니들이랑 가사도우미들로 북적였다. 그 사이에 끼어 선 열일곱 살 남자애는 누가 봐도 튀었다. 명월은 철문 옆 벽에 등을 붙이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같은 반 놈들은 지금쯤 오락실에서 철권 한 판에 목숨을 걸고 있겠지. 지난주엔 아청이 새 기록을 세웠다고 난리였는데.

종이 울리자 노란 모자를 쓴 꼬맹이들이 병아리 떼처럼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서명하"형아아아아!"

조그만 몸이 포탄처럼 날아와 명월의 허벅지에 쿵 부딪혔다. 명월은 한 발짝도 밀리지 않고 아이의 뒷덜미를 붙잡아 번쩍 들어 올렸다.

서명월"야, 야, 서명하. 뛰지 말랬지. 넘어지면 누가 잡아준다고."

서명하"형아가!"

서명월"얼씨구? 누구 맘대로?"

말은 그렇게 해놓고 손은 벌써 아이 가방을 빼앗아 제 어깨에 걸고 있었다. 명하가 비닐봉지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명월은 에그타르트 하나를 꺼내 쥐여주며 부스러기 흘리지 말라고 투덜댔지만, 결국 부스러기는 죄다 명월의 교복 바지 위로 떨어졌다. 털어도 버터 기름 자국은 남았다. 내일 다림질은 또 제 몫이었다.

8층까지는 엘리베이터 없이 좁은 계단을 올라야 했다. 층을 오를 때마다 문틈으로 저녁 냄새가 새어 나왔다. 간장에 졸인 돼지고기 냄새, 뭉근하게 끓는 쌀죽 냄새, 그리고 어느 집에선가 볼륨을 한껏 키운 광둥어 드라마 소리. 등 뒤에선 명하가 오늘 유치원에서 누가 울었고 누가 코를 팠고 누가 그 코딱지를 먹었는지 숨도 안 쉬고 떠들어댔다.

서명월"어어, 그래. 네가 짱이다, 최고."

대꾸는 건성이었는데, 계단을 딛는 걸음만큼은 등에 업힌 것도 아닌 아이가 휘청이지 않게 꼬박꼬박 속도를 맞추고 있었다.

805호 철문 너머에서 할머니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벌써 새어 나왔다. 누가 또 욕실을 붙잡고 안 나오는 모양이었다. 명월은 한숨을 한 번 쉬고 나서야 문을 열었다.

철문을 열자마자 열기와 소음이 한꺼번에 얼굴로 덮쳐 왔다.

스무 평도 안 되는 집이었다. 거실이 곧 식당이었고, 그 한가운데엔 접이식 원탁이 다리를 벌리고 버티고 있었다. 벽을 따라 이층 침대 두 개가 어깨를 맞대고 붙어 있어서, 누가 위 칸에서 뒤척이기만 해도 온 방에 삐걱 소리가 울렸다. 천장 선풍기는 곧 떨어질 것처럼 덜덜거리며 돌았고, 그 아래로 빨래 바구니와 교과서, 누구 건지 모를 슬리퍼 한 짝이 발 디딜 틈 없이 굴러다녔다. 저 슬리퍼는 지난주부터 짝을 못 찾고 있었다.

할머니"야아악! 명진! 물값은 네가 내냐! 당장 안 나와?!"

욕실 문 너머에서 명진이 "나가, 나간다고!" 하고 악을 썼다. 할머니는 국자를 쥔 채 욕실 앞에 딱 버티고 서 있었다. 키는 명월의 가슴께에도 못 미쳤지만, 이 집에서 저 국자한테 대드는 간 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명월"다녀왔어요."

할머니"오냐. 손부터 씻어라."

돌아보지도 않고 떨어진 한마디였다. 명월은 명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이는 발이 닿기가 무섭게 이층 침대 아래 칸으로 쏙 기어 들어가더니 명아가 아끼는 토끼 인형을 낚아챘다. 곧바로 귀청이 떨어질 듯한 비명이 터졌다.

서명아"아악! 오빠!! 명하가 또 내 거 가져갔어!"

서명월"...후, 서명하."

명월은 쪼그려 앉아 침대 밑으로 팔을 쑥 집어넣었다. 버둥대는 작은 손에서 인형을 빼내 명아 쪽으로 휙 던져주자, 이번엔 명하의 입꼬리가 축 처졌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얼굴이었다. 명월은 한숨을 삼키고 비닐봉지에 남은 에그타르트를 꺼내 그 손에 쥐여줬다.

서명월"누나 거 괜히 뺏지 말고. 이거나 먹어."

울상이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이렇게 쉬운 놈이 어디 있나 싶었다.

부엌은 어른 둘이 서면 꽉 차는 크기였다. 어머니가 가스레인지 앞에서 청경채를 볶고 있었고, 기름 튀는 소리와 마늘 냄새가 좁은 공간에 가득했다. 명월은 그 등 뒤로 몸을 옆으로 비틀어 간신히 개수대에 손을 들이밀었다. 찬물이 까진 마디에 닿자 쓰라렸다.

어머니"아이고, 손은 또 왜 그래. 또 다쳤니? 테이핑은."

서명월"...했어요."

어머니"했는데 그 꼴이야? 관장님한테 물어볼까?"

어머니는 웍을 흔들던 손을 멈추지도 않고 팔꿈치로 명월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명월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비키지는 않았다. 대신 손을 대충 바지에 닦고 선반에서 그릇 여덟 개를 꺼냈다.

여섯 시가 넘어서 현관문이 다시 열렸다. 택시 운전을 마친 아버지가 땀에 절어 등에 달라붙은 셔츠 차림으로 들어섰고, 그 뒤로 편의점 유니폼을 입은 큰누나 명주가 신발을 구겨 신은 채 따라 들어왔다.

서명주"다녀왔습니다. 아, 명월. 이번 대회 언제야?"

서명월"...그건 왜?"

서명주"왜긴 왜야. 네 대회인데. 응원하러 가야지."

서명월"...아. 안 와도 되는데."

서명주"까불지 말고 날짜나 불어."

명월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귀 끝이 살짝 달아올랐는데, 그건 순전히 부엌에서 나오는 열기 탓이었다. 적어도 명월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여덟 식구가 원탁에 둘러앉자 팔꿈치가 쉴 새 없이 부딪혔다. 명아가 젓가락을 떨어뜨렸고, 머리에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명진은 고기를 너무 많이 집었다가 할머니한테 손등을 찰싹 맞았다. 그 소란 속에서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제 그릇의 고기를 명월 쪽으로 슬쩍 밀었다.

아버지"먹어라. 체급 맞춰야지."

서명월"...감량 중인데요."

아버지"그럼 명진이 줘."

명진의 눈이 번쩍 빛났다. 명월은 잠깐 그릇을 내려다보며 머리를 굴리다가, 고기를 딱 반만 명진의 그릇에 덜어주고 나머지는 입에 털어 넣었다. 관장한테 걸리면 줄넘기 천 개였지만, 아버지가 준 걸 다 넘겨주기는 어쩐지 아까웠다.

텔레비전에선 저녁 뉴스가 웅얼웅얼 흘러나왔다. 해외 몇몇 도시에서 원인 불명의 전파 교란이 관측됐다는 짧은 소식이었는데, 식탁에 앉은 누구도 화면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할머니가 리모컨을 집어 들어 채널을 드라마로 휙 돌렸고, 원탁 위엔 금세 다시 수다와 웃음소리가 넘쳐났다.

창밖으로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장대에 걸린 빨래 틈새로 붉은빛이 비집고 들어와, 비좁고 시끄러운 방 안을 천천히 물들였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805호의 불이 꺼졌다.

불을 꺼도 집은 조용해지지 않았다. 반대편 이층 침대에서는 명진이 뿌득뿌득 이를 갈았고, 커튼 한 장으로 나눈 안쪽에서는 아버지의 코골이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창밖에선 에어컨 실외기가 쉬지 않고 웅웅거렸다. 빨래 틈으로 새어 든 가로등 불빛이 천장에 일렁이는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래 칸 침대는 열일곱 살 남자애 혼자 눕기에도 빠듯했다. 명월은 벽에 등을 붙이고 모로 누워 있었고, 명하는 그 품 안쪽에 쏙 파고들어 있었다. 아이 발이 자꾸만 명월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서명하"혀엉."

서명월"엉."

서명하"진짜 대회 나가?"

명월은 눈을 감은 채 한숨을 쉬었다. 대답을 안 해주면 이 녀석은 백 번이고 물어볼 게 뻔했다.

서명월"응, 나가."

서명하"언제??"

서명월"다음 달."

서명하"다음 달이 몇 밤 자면 돼?"

서명월"...서른 밤쯤."

명하는 조그만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나갔다. 열 개를 다 접고 나자 이번엔 명월의 손을 끌어다 그 손가락까지 접기 시작했다. 명월은 테이핑 자국이 남은 손을 군말 없이 내어줬다.

서명하"그럼 형아가 이기면 짱이야? 텔레비에 나와?"

서명월"아직 그런 거 아니야. 아마추어라서."

서명하"아마추어가 뭔데?"

서명월"...아직 잘 못한다는 거."

서명하"형아 잘하잖아. 명진이 형도 맨날 형한테 져."

어둠 속에서 명월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명하한테 들키지 않을 만큼만.

서명월"명진이는 원래 약해."

서명하"헤헤. 그럼 이기면 돈 많이 벌어? 왕 큰 로봇 사줄 수 있어?"

서명월"...어린 게 벌써 돈타령이야. 잠이나 자라."

서명하"...치."

명하가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명월의 가슴팍에 이마를 쿵 박았다. 명월은 잠깐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서명월"...이기면. 큰 건 힘들고, 작은 거 사줄게."

서명하"진짜?? 약속!"

코앞으로 새끼손가락이 불쑥 들이밀어졌다. 명월은 귀찮다는 얼굴로 제 새끼손가락을 걸어줬고, 명하는 엄지 도장까지 꾹 찍고 나서야 만족한 듯 몸을 웅크렸다.

한동안 조용했다. 명월은 아이가 잠든 줄 알았다.

서명하"형아는 이름이 왜 명월이야?"

서명월"...할머니가 지었어. 나 태어난 날 달이 엄청 밝았대."

서명하"그럼 나는?"

서명월"넌 여름에 태어나서 명하. 대충 지은 거야."

서명하"아니거든!"

명하가 이불 속에서 발길질을 했다. 명월은 낮게 웃으며 그 발목을 붙잡아 도로 이불 안에 밀어 넣었다.

서명하"...대회 가면 멀리 가?"

서명월"완차이. 지하철 타면 금방이야."

서명하"그럼 다시 와?"

서명월"당연하지. 안 오면 어디 가."

서명하"...응."

그 대답을 마지막으로 명하의 숨소리가 느릿해졌다. 작은 손은 잠든 뒤에도 명월의 셔츠 자락을 꼭 쥐고 있었다.

명월은 한참 그 손을 내려다봤다. 떼어내려다가 그만두고, 대신 흘러내린 이불을 아이 어깨까지 끌어 올려줬다.

창밖 빨래 틈새로 반쯤 찬 달이 걸려 있었다. 명월은 그걸 잠깐 올려다보다 눈을 감았다.

서른 밤이면 금방이었다.


대회 날 아침, 805호는 평소보다 두 배는 시끄러웠다.

창밖은 아직 희뿌옜다. 명월은 현관 앞에 쪼그려 앉아 운동화 끈을 묶고 있었는데, 발목에 감은 테이핑이 신발 안에서 뻑뻑하게 걸렸다. 그 등 뒤로 어머니의 잔소리가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어머니"마우스피스 챙겼어? 글러브는? 붕대 여분은?"

서명월"...다 챙겼어요."

어머니"물은? 바나나는? 계체량 끝나면 바로 먹으라고 싸놨잖아."

서명월"넣었어요. 넣는 거 봤잖아요."

어머니"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저번엔 수건 두고 갔으면서."

어머니는 기어이 가방 지퍼를 열고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명월은 한숨을 푹 쉬고 머리를 긁었다. 말려봤자 소용없다는 건 열일곱 해 동안 충분히 배웠다.

그때 할머니가 부엌에서 종종걸음으로 나왔다. 손에는 붉은 종이 한 장이 접혀 있었다.

할머니"명월아, 이거 가져가라. 황대선 사당에서 받아온 거다."

서명월"할머니, 그런 거 필요 없다니까요."

할머니"필요 없긴 뭐가 없어! 링 위에서 사람 치고받는 게 장난이냐? 주머니에 넣어라."

서명월"경기복엔 주머니가 없어요."

할머니"이익! 그럼 신발에 넣어!"

할머니 눈썹이 한껏 치켜 올라갔다. 손에 국자가 없는데도 기세는 똑같았다. 명월은 잠깐 버티는 척하다가 결국 손을 내밀었고, 부적은 가방 제일 안쪽 주머니, 마우스피스 케이스 옆자리에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그러다 갑자기 다리가 무거워졌다. 내려다보니 명하가 명월의 다리에 매달려 있었다.

서명하"형아! 서른 밤 다 됐어! 나도 갈래!"

서명월"넌 유치원 가야지."

서명하"싫어어! 형 이기는 거 볼 거야!"

서명아"오빠!! 이기면 명하만 뭐 사주기로 했다면서!! 불공평해!!!"

서명진"형! 지면 내가 대신 복수해줄게."

서명월"...풉, 넌 나한테도 지면서."

명진이 억울하다는 듯 명월의 등을 퍽 쳤지만, 명월은 꿈쩍도 하지 않고 명하를 다리에서 떼어냈다. 아이는 떨어지자마자 도로 달라붙었다. 그걸 세 번쯤 반복하고 나서야 명월은 포기하고 아이를 번쩍 안아 올렸다.

서명월"...저녁에 올 거야. 이기면 로봇. 약속."

서명하"...진짜로?"

서명월"응. 진짜로."

식탁에서 신문을 보던 아버지가 고개를 들었다. 켜놓은 텔레비전 화면이 잠깐 지직거리며 흔들렸고, 아버지는 리모컨으로 두어 번 두드려 보다가 그만뒀다.

아버지"명월아."

서명월"예."

아버지"...다치지 마라."

그게 전부였다. 명월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편의점 조끼를 걸치던 명주가 현관으로 다가와 명월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서명주"오후 경기지? 알바 끝나고 바로 갈게."

서명월"...아 씨! 머리..."

짜증을 부리면서도 명월은 명하를 바닥에 내려놓고 가방을 멨다. 철문을 열자 복도의 눅눅한 공기가 밀려들었고, 등 뒤에서 여덟 식구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따라붙었다. 잘 다녀와, 물 많이 마셔, 부적 버리지 마라, 로봇 잊지 마.

명월은 돌아보지 않고 손만 한 번 들어 보였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평소보다 조금 가벼웠다.


삼수이포역 장면 삽화

삼수이포역 승강장은 출근하는 사람들로 빽빽했다.

명월은 가방을 앞으로 돌려 메고 전동차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췬완선 아침 열차는 늘 그랬다. 정장 차림의 회사원, 교복을 입은 학생들, 장바구니를 든 할머니들이 한데 뒤엉켜 서로의 어깨에 기대 섰다. 에어컨 바람이 머리 위에서 쏟아졌지만 사람들의 체온을 이기지는 못했다.

손잡이를 잡은 명월의 손가락 마디가 저절로 까딱거렸다. 원, 투, 로우킥. 관장이 백 번은 넘게 외치던 콤비네이션이 머릿속에서 저절로 굴러갔다. 상대는 왼손잡이였다. 가드가 내려오는 순간 오른쪽 로우. 거리만 잡으면 된다.

몽콕, 야우마테이, 찜사초이. 역을 지날수록 사람은 조금씩 빠졌다. 찜사초이를 떠난 열차가 해저 터널로 진입하자 창밖이 새카맣게 변했다. 유리창에 비친 제 얼굴이 보였다. 부스스한 머리, 긴장한 턱선. 명월은 괜히 시선을 돌렸다.

옆에 선 회사원이 휴대폰을 흔들며 인상을 찌푸렸다.

회사원"...또 먹통이네. 요즘 왜 이래."

그 순간이었다.

끼이이익—

쇳소리가 귀를 찢었다. 전동차가 급정거하며 사람들이 한쪽으로 쏠렸다. 명월은 반사적으로 무릎을 낮추고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옆에서 넘어지던 할머니의 팔을 한 손으로 붙잡았다. 장바구니에서 귤이 굴러 바닥에 흩어졌다.

천장 조명이 지직거리며 두어 번 깜빡였다. 그리고 꺼졌다.

비상등의 희미한 주황빛만 남았다.

할머니 승객"아이고, 아이고... 이게 무슨..."

서명월"...괜찮으세요? 잡으세요, 여기."

명월은 할머니의 손을 손잡이 기둥에 얹어주고 고개를 들었다. 에어컨이 멈췄다. 순식간에 공기가 눅진해졌다.

스피커에서 치직, 하는 잡음이 흘러나왔다.

안내 방송"승객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현재 신호 장애로 인해 열차가 잠시... 치지직... 정차... 치직... 안전을 위해..."

방송은 끝나지 않고 잡음 속으로 먹혀들었다.

누군가 휴대폰 플래시를 켰다. 하나, 둘, 불빛이 늘어났다. 전부 신호가 없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커졌다. 아이 하나가 울기 시작했다.

터널 벽 너머 어딘가에서, 아주 낮고 긴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바다 밑에서 무언가가 뒤척이는 것처럼.

명월은 저도 모르게 가방끈을 꽉 쥐었다. 가방 안쪽 주머니, 붉은 부적이 든 자리였다.

진동은 느리고 묵직했다. 운동화 밑창을 타고 올라온 떨림이 정강이를 지나 등뼈를 긁더니 어금니까지 저릿하게 울렸다. 머리 위 손잡이들이 저희끼리 딸각딸각 부딪쳤다. 옆에서 투덜거리던 회사원도 입을 다물었고, 울던 아이마저 울음을 멈췄다. 그러자 터널 안이 이상할 만큼 조용해졌다.

앞 칸 쪽에서 빛이 샜다.

명월은 그걸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랐다. 보라색이라고 하기엔 너무 어두웠고, 검은색이라고 하기엔 분명히 빛나고 있었다. 오래 보면 눈 안쪽이 쑤셨다. 연결 통로 너머의 허공이 누가 칼로 그은 것처럼 세로로 갈라져 있었고, 그 틈이 숨 쉬듯 벌어졌다 오므라들었다.

회사원"...저게 뭐야."

대답은 비명으로 돌아왔다.

틈 사이로 뭔가가 기어 나왔다. 덩치는 사람만 했는데 사람처럼 생긴 곳이 하나도 없었다. 허옇게 뜬 살가죽 밑으로 뼈가 엉뚱한 방향으로 불거져 있었고,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엔 세로로 쭉 찢어진 입 하나뿐이었다. 하나가 나오자 그 뒤로 또 하나가 따라 나왔다.

그 뒤로는 순서가 없었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뒤로 밀려들었다. 명월의 등이 누군가의 가슴팍에 짓눌렸고, 발밑에서 귤이 터지며 미끄덩한 감촉이 번졌다. 넘어지려는 할머니 승객의 팔을 붙잡아 옆구리에 끼웠다.

할머니 승객"아이고, 부처님, 부처님..."

서명월"제 옷 잡고 계세요. 절대 놓지 마시고요."

목소리가 떨리는 게 스스로도 들렸다. 명월은 그게 짜증 났다.

누군가 비상 레버를 당겼다. 문이 한 뼘쯤 열리다 걸리자 남자 둘이 손을 쑤셔 넣고 억지로 벌렸고, 사람들이 그 틈으로 몸을 던졌다. 선로 위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와 발목이 꺾여 지르는 비명이 뒤섞였다.

그때 연결 통로 문이 종잇장처럼 우그러졌다.

그것이 명월이 있는 칸으로 들어왔다. 천장에 닿은 머리를 수그리고 바닥을 긁으며 다가오는 꼴이, 체급 따위로는 가늠이 안 됐다. 제일 앞에 있던 남자가 장우산을 휘둘렀다. 우산대는 그것의 머리통에서 허무하게 꺾였고, 찢어진 입이 벌어지더니 남자의 비명이 중간에 뚝 끊겼다.

명월은 생각하기 전에 이미 골반을 틀고 있었다.

축발을 돌리고, 정강이를 꽂는다. 관장이 귀에 딱지가 앉도록 외치던 미들킥이 그것의 옆구리에 정확히 들어갔다. 샌드백이었다면 체인째 출렁였을 한 방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콘크리트 기둥을 걷어찬 것 같았다. 충격이 전부 되돌아와 정강이뼈가 윙윙 울렸고, 무릎 아래가 순식간에 남의 다리처럼 멀어졌다. 거리를 잴 수도 없었고 가드를 읽을 수도 없었다. 애초에 가드라는 게 없었다. 관장님, 이건 아니잖아요. 이런 건 안 가르쳐줬잖아요.

어린아이"엄마아! 엄마아아!!"

좌석 밑에서 여자아이 하나가 울고 있었다. 노란 머리핀을 꽂은, 명하 또래쯤 되는 애였다.

명월은 이를 악물었다. 저린 다리를 질질 끌며 한 발 물러나 아이의 팔을 낚아챘다. 아이를 품에 끌어안고 다른 손으로는 할머니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것이 쓰러진 남자 위로 몸을 숙이는 걸 곁눈으로 보면서, 명월은 열린 문틈으로 몸을 던졌다.

자갈이 무릎을 찢었는데 아픈 줄도 몰랐다.

터널은 새카맸다. 앞뒤로 휴대폰 불빛들이 제각각 흔들리며 흩어졌고, 비명이 벽을 타고 울려서 어느 쪽에서 들려오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등 뒤 전동차 안에서 무언가 축축하게 씹히는 소리가 났다.

서명월"뛰어요! 멈추지 말고, 제발!"

품 안의 아이가 셔츠를 쥐어뜯을 듯 붙잡았다. 등에 멘 가방이 걸음마다 덜컹거렸다.

달리는 내내 명월의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만 맴돌았다. 오늘 아침 현관에서 매달리던 명하, 국자 대신 부적을 쥐고 있던 할머니,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두드리던 아버지.

거기에도 이런 게 나타났으면 어떡하지.

개문 후 반년이 지나자, 삼수이포의 하늘을 덮던 빨래는 절반쯤 줄어 있었다.

장대는 그대로 창밖에 튀어나와 있었지만 거기 걸린 게 없는 집이 많았다. 떠난 집도 있었고, 빨래를 널 사람이 없어진 집도 있었다. 남은 집들은 창문에 신문지를 덧대거나 테이프를 X자로 붙여놓았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옆집이 붙이니까 다들 따라 붙였다.

할머니"물 한 바가지면 된다고 했지! 그걸로 머리까지 감으면 저녁엔 뭘로 밥을 해!"

서명진"세수만 했어! 진짜 세수만!"

욕실 앞에 선 할머니의 손엔 이제 국자 대신 물통이 들려 있었다. 단수는 사흘에 한 번꼴로 찾아왔고, 물이 나오는 날이면 할머니는 욕조와 냄비와 페트병까지 전부 꺼내 채웠다. 명월은 현관 앞에 쪼그려 앉아 운동화 끈을 묶었다. 대회 날 아침에 묶었던 것과 같은 운동화였는데, 밑창이 그새 한쪽으로 닳아 있었다.

식탁에는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신문은 없었다. 신문은 두 달 전부터 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대신 택시 열쇠를 손바닥 위에서 굴리고 있었는데, 그걸 들고 나가지는 않았다. 아파트 앞 골목에 세워둔 택시는 지붕에 먼지가 뿌옇게 앉아 있었다. 요즘 누가 차를 타고 멀리 가려 하겠나. 가봤자 길이 막혀 있거나, 막힌 길 끝에 뭐가 있을지 모르는 판이었다.

아버지"...오늘도 배급소 가냐."

서명월"예. 명진이는 두고 갈게요."

서명진"나도 갈 수 있거든?"

서명월"넌 집이나 지켜."

명진이 뭐라고 더 투덜댔지만 명월은 듣지 않았다. 가방을 멨다. 안에는 빈 쌀 포대 두 장과 물병, 그리고 끈을 칭칭 감아 묶은 쇠파이프 한 토막이 들어 있었다.

부엌 쪽 커튼이 걷히고 명주가 나왔다. 편의점 조끼 대신 늘어난 티셔츠 차림이었다. 누나가 일하던 편의점은 석 달 전에 통째로 무너졌다. 유리창이 전부 안쪽으로 박살 나 있었고, 계산대는 반으로 접혀 있었다. 누나는 그날 비번이었다. 그 사실을 두고 할머니는 사당에 가서 절을 백 번 했다.

서명주"명월. 오늘은 줄 서지 말고 그냥 와. 저쪽 블록에 또 뭐 나왔다더라."

서명월"...뭐가 나왔는데."

서명주"몰라. 옆집 아주머니가 그러던데. 그냥 와."

서명월"빈손으로 오면 뭐 먹게."

누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명월은 괜히 그 얼굴을 오래 보지 않으려고 신발 끈을 한 번 더 조였다.

그때 다리가 무거워졌다. 내려다볼 필요도 없었다.

서명하"형아. 어디 가?"

서명월"쌀 받으러."

서명하"나도."

서명월"안 돼."

명하는 떼를 쓰지 않았다. 반년 전이었으면 울고불고 매달렸을 텐데, 요즘은 안 된다는 말을 한 번만 들어도 손을 놓았다. 명월은 그 사실이 참을 수 없이 불편했다. 아이는 명월의 바짓단을 잠깐 만지작거리다가 조그맣게 물었다.

서명하"...형아 대회는 이제 안 해?"

명월의 손이 멈췄다.

서명월"...안 해. 취소됐어."

서명하"그럼 로봇은?"

서명월"..."

서명하"괜찮아. 안 사줘도 돼."

아이가 먼저 그렇게 말하고는 할머니 쪽으로 쪼르르 달아났다. 명월은 한참 현관에 쪼그린 채로 있다가, 머리를 벅벅 긁고 일어섰다.

골목은 조용했다. 반년 전엔 이 시간이면 차찬텡에서 기름 냄새가 흘러나오고, 셔터를 올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지금은 절반이 넘는 가게가 셔터를 내린 채였고, 내린 셔터 위엔 붉은 스프레이로 사람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찾습니다, 연락주세요, 살아 있으면. 통신이 먹통이 된 지 오래라 전화번호는 아무 쓸모가 없었는데도 사람들은 계속 적었다.

차찬텡도 문을 닫았다. 주인아저씨는 두 달 전에 딸이 사는 신계 쪽으로 간다며 떠났다. 떠나기 전날 명월에게 마지막 남은 연유 한 캔을 쥐여주면서, 형이 착하니까 동생들 잘 챙기라고 했다. 그 뒤로 소식은 없었다.

명월은 오락실 앞을 지나지 않으려고 한 블록을 돌아갔다. 돌아가면 오 분이 더 걸렸지만 상관없었다.

그래도 결국 눈에 들어왔다. 길 건너편, 반쯤 내려앉은 오락실 간판이 보였다. 불이 꺼진 지 오래된 네온관 몇 개가 전선에 매달려 대롱거렸다. 유리문 너머로 철권 기계가 쓰러져 있는 게 어렴풋이 보였다.

아청은 개문 첫 주에 죽었다.

그날 명월이 터널에서 겨우 기어 나와 삼수이포로 걸어 돌아오는 동안, 아청은 몽콕 어딘가에 있었다고 했다. 시신은 찾지 못했다. 아청의 어머니가 이 골목 셔터마다 아들 이름을 적고 다녔는데, 한 달쯤 지나자 그 글씨 위에 다른 사람들 이름이 덧칠됐다. 지금은 그 셔터 어디에 아청의 이름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배급소는 삼수이포 스포츠센터 주차장에 차려져 있었다.

원래는 동네 아이들이 농구를 하던 자리였다. 지금은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었고, 입구엔 모래주머니가 허리 높이로 쌓여 있었다. 그 위에 걸터앉은 군인 둘이 소총을 무릎에 걸친 채 줄을 내려다봤다. 둘 다 명주 누나 또래쯤 돼 보였는데, 눈 밑이 거뭇했다.

줄은 이미 길 건너 버스정류장까지 늘어서 있었다. 명월은 맨 끝에 가서 섰다. 앞에 선 아주머니는 유모차를 밀고 있었는데, 그 안에 아기 대신 빈 물통이 세 개 들어 있었다. 아무도 크게 말하지 않았다. 가끔 누가 기침을 하거나, 발을 옮기며 슬리퍼를 끄는 소리만 났다.

줄은 느리게 줄어들었다. 명월은 가방끈을 쥔 채 철조망 너머를 봤다. 천막 아래 쌀 포대와 통조림 상자가 쌓여 있었고, 군인들이 신분증을 확인하고 식구 수대로 봉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여덟 식구라고 하면 늘 한 번 더 확인했다. 전부 살아 있느냐고.

철조망 옆 게시판에는 종이가 겹겹이 붙어 있었다. 대부분은 사람을 찾는 벽보였다. 삐뚤빼뚤한 손글씨, 흐릿하게 복사된 증명사진, 몇 번이고 비에 젖었다 마른 자국. 그런데 그 한가운데, 새로 붙인 듯 빳빳한 인쇄물 한 장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붉은 테두리에 굵은 글씨였다.

그 아래엔 누군가 볼펜으로 휘갈겨 놓은 낙서가 있었다. 끌려가면 안 돌아온다.

명월은 그 종이를 한참 들여다봤다. 소문은 이미 동네에 파다했다. 몽콕 어딘가에서 맨손으로 그것들을 찢어발긴 남자가 있었다더라, 까우룽 시티에서는 손에서 불이 나가는 여자애를 군인들이 트럭에 태워 갔다더라. 누구는 영웅이라 했고, 누구는 그것들이랑 똑같은 괴물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그런 얘기가 나올 때마다 부처님을 찾으며 입을 막으라고 했다.

우선 배급. 안전 거주지.

명월은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까진 자리가 아물고 또 까져서 굳은살이 된 마디. 터널에서 그것을 걷어찼을 때 정강이뼈가 울리던 감각이 아직도 가끔 꿈에 나왔다. 이 손으로는 아무것도 못 했다. 아청도, 그날 우산을 휘두르던 남자도.

배급소 군인"다음! 신분증."

어느새 차례가 와 있었다. 명월은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 내밀었다. 군인은 화면도 없는 태블릿 대신 종이 명부에 손가락을 짚어 내려가다가 멈췄다.

배급소 군인"서씨네, 805호. 여덟 명 맞아?"

서명월"...예. 여덟 명이요."

배급소 군인"전부 살아 있고?"

서명월"예."

군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뒤에 대고 뭐라 외쳤다. 쌀 봉지 두 개와 통조림 몇 개, 분유 한 통이 모래주머니 위로 올라왔다. 지난번보다 확실히 적었다. 명월이 입을 열기도 전에 군인이 먼저 말했다.

배급소 군인"물량 줄었어. 불만 있으면 위에다 해."

명월은 입을 다물고 쌀 포대에 봉지를 옮겨 담았다. 뒤에서 누군가 한숨을 쉬었고, 그보다 더 뒤에서 누군가 욕을 했다. 모래주머니 위의 군인이 소총을 고쳐 쥐자 욕은 금세 잦아들었다.

포대를 어깨에 둘러메고 돌아서는데, 게시판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명월 아버지 또래쯤 돼 보였다. 그는 붉은 테두리 종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더니 옆에 있던 군인에게 낮게 물었다.

중년 남자"...이거, 가족도 같이 데려가 주는 겁니까? 진짜로?"

군인은 대답하지 않고 턱짓으로 천막 안쪽을 가리켰다. 남자는 잠깐 망설이다가 그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명월은 그 등을 끝까지 보지 않았다. 대신 포대를 한 번 추슬러 메고 철조망 밖으로 나왔다.

돌아가는 길에 명주 누나 말이 떠올랐다. 저쪽 블록에 또 뭐 나왔다더라. 명월은 오락실 쪽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번엔 가장 빠른 길을 골랐다. 쌀 포대가 걸음마다 등을 쳤다.


집으로 돌아오자 평소 같은 소란 대신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할머니도, 명진이도, 명아도 원탁 앞에 붙어 앉아 텔레비전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명하는 어머니 무릎 위에 올라가 있었고, 명주는 부엌 커튼을 반쯤 걷어 쥔 채 그 자리에 붙박인 것처럼 서 있었다. 천장 선풍기만 혼자 삐걱거리며 돌았다. 명월이 쌀 포대를 현관 옆에 내려놓자 쿵 소리가 났는데도 돌아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서명월"...다녀왔어요."

할머니"쉿. 저거 봐라, 저거."

화면 아래로 긴급 국제 회담 생중계라는 붉은 자막이 흘러가고 있었다. 길게 놓인 테이블 뒤로 여러 나라 국기가 늘어서 있었고,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전파가 불안한지 화면이 이따금 가로로 찢어졌다가 돌아오곤 했는데, 아버지는 이번만큼은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두드리지 않았다. 괜히 건드렸다가 아예 꺼져버릴까 봐 그러는 것 같았다.

테이블 한가운데엔 다른 사람들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흰 셔츠에 베스트를 받쳐 입었고, 머리카락이 눈처럼 하얬다. 카메라가 그쪽으로 넘어가자 화면 너머 기자석이 한꺼번에 술렁였다.

뉴스 앵커"…지금 발언을 시작하는 인물이 이번 회담을 주도한 각성자 측 대표로 알려져 있습니다. 코드네임 코스모스, 신원은 공개되지 않았으며…"

남자는 서두르는 기색 없이 마이크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였다. 광둥어 동시통역이 겹쳐 흘러나왔는데도, 그 밑에 깔린 원래 목소리가 이상할 만큼 또렷하게 들렸다.

코스모스"먼저, 지난 반년 동안 충분한 설명을 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 채 가족을 잃으셨고, 지금도 그 불안 속에서 하루를 버티고 계십니다. 그 사실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목에 잔뜩 힘을 준 정치인들 목소리와는 달랐다. 한 음절도 흐트러지지 않는데 이상하게 딱딱하게 들리지가 않아서, 원탁 앞의 식구들은 저도 모르게 조금씩 화면 쪽으로 몸을 당기고 있었다.

코스모스"균열은 앞으로도 계속 발생할 것입니다. 이 점은 숨기지 않겠습니다. 또한 그 안에서 나오는 존재들을 기존의 군사력만으로 막을 수 없다는 것도, 여러분은 이미 직접 보셨을 겁니다."

명월은 신발도 벗지 못한 채 현관에 서 있었다. 터널의 주황색 비상등이며 허무하게 꺾이던 우산대, 정강이로 고스란히 되돌아오던 충격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는데, 저 사람은 그걸 참 담담하게도 말했다.

코스모스"이에 따라 오늘, 각국은 단일 국제기구의 설립에 합의했습니다. 테미스는 국경과 관계없이 균열에 대응하며, 각성한 이들을 보호하고, 교육하고, 관리하게 될 것입니다."

관리라는 말을 할 때도 그의 목소리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대신 옆자리의 누군가가 서류를 넘기는 소리가 마이크에 잡혔다.

코스모스"각성자는 괴물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자녀이고, 형제이고, 이웃입니다. 신체에 설명할 수 없는 변화가 생겼다면 숨기지 마시고 가까운 거점에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통제되지 않은 힘은 가장 먼저 그 사람 자신을 해칩니다. 테미스는 그것을 막기 위해 존재합니다."

서명진"…배급소에 붙은 그거랑 같은 얘기네."

명진이 중얼거리기가 무섭게 할머니가 그 손등을 찰싹 때렸다.

할머니"그런 소리 입에 올리지도 마라. 끌려가면 안 돌아온다더라."

서명주"할머니, 저 사람은 보호한다잖아요."

할머니"보호는 무슨. 말 번지르르한 놈치고 속 편한 놈 못 봤다."

화면 속에서 기자 하나가 벌떡 일어나 뭐라고 외쳤고, 통역이 반 박자 늦게 따라붙었다. 각성자가 이형과 같은 힘을 쓴다는 소문이 사실이냐고, 이 균열의 원인을 알고 있는 것 아니냐고. 회담장이 잠깐 소란스러워졌다.

코스모스는 그 질문을 끝까지 다 듣고 나서 아주 조금 웃었다. 아니라고 하는 얼굴도, 그렇다고 하는 얼굴도 아니었다.

코스모스"궁금하신 점이 많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모든 질문에 답을 드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저 역시 바랍니다. 다만 오늘, 한 가지만은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혼자 싸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마이크에서 물러나 앉았다. 다음 발언자가 뭔가를 읽기 시작했지만 화면이 또 지직거리며 흔들리더니 이번엔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고, 식구들은 회색 잡음만 남은 화면을 그대로 한동안 보고 있었다.

먼저 몸을 일으킨 건 어머니였다. 명하를 무릎에서 내려놓고 일어서면서, 현관에 선 명월 쪽을 돌아봤다.

테미스라는 이름이 뉴스에 처음 나오고 몇 달이 지나는 동안, 소문으로만 떠돌던 각성자들이 하나둘 삼수이포 골목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은 12층 사는 웡씨네 둘째 딸이었다. 명주 누나와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언니였는데, 어느 밤 그 집 창문에서 형광등보다 훨씬 하얀 빛이 새어 나왔다는 얘기가 아침이 되기도 전에 계단을 타고 온 동네로 퍼졌다. 사흘 뒤 아파트 앞에 군용 트럭이 섰고, 웡씨네 식구들은 보따리 몇 개만 챙겨 그 트럭에 올라탔다. 할머니는 창틀에 매달리다시피 해서 그 광경을 내려다보며 쯧쯧 혀를 찼지만, 웡씨 아주머니가 트럭 짐칸에서 이웃들을 향해 손을 흔들 때 그 얼굴은 분명 웃고 있었다.

서명진"봐, 끌려가는 거 아니잖아. 가족까지 다 데려가잖아."

할머니"가 봐야 아는 거다. 입 다물고 밥이나 먹어."

그 뒤로는 소식이 잦아졌다. 시장 골목 생선가게 아들이 맨손으로 셔터를 찢었다고 했고, 누구네 할아버지가 몇십 년 만에 안경 없이 신문 글씨를 읽는다고 했다. 반쯤은 부풀려진 얘기였고 반쯤은 진짜였는데, 어느 쪽이든 배급소 게시판의 붉은 테두리 종이 앞에 서는 사람은 눈에 띄게 늘었다. 우선 배급이라는 말은 빈 쌀독 앞에서 생각보다 훨씬 크게 들렸다.

좋은 소문만 도는 건 아니었다. 초겨울 무렵, 두 블록 건너 아파트에서 한 남자애가 한밤중에 비명을 지르며 제 집 벽을 부수고 나왔다. 명월 또래였다고 했다. 붉게 번들거리는 눈으로 계단을 뛰어 내려오면서 저를 붙잡으려던 제 아버지의 팔을 부러뜨렸고, 그 애를 멈춘 건 군인들의 총이 아니라 뒤늦게 도착한 검은 제복 차림의 사람 둘이었다고 했다. 그 애가 어디로 실려 갔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음 날 그 집 셔터 위에도 이름 하나가 새로 적혔다.

그날 이후로 동네 공기가 달라졌다. 각성했다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들은 그 집 앞을 지날 때 걸음을 조금 빨리했고, 아이들한테는 그 집 애랑 놀지 말라고 일렀다. 반대로 어떤 집은 식구 중 누가 열만 나도 혹시 그거 아니냐며 반쯤 기대에 찬 얼굴로 이마를 짚어 보았다. 괴물이라고 수군대는 말들과 부럽다고 수군대는 말들이 같은 골목에서 같은 날 교차했다.

명월은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말이 없어졌다.

저녁을 먹고 식구들이 하나둘 이층 침대로 올라가면, 명월은 창가에 걸터앉아 가로등 불빛에 제 손을 비춰 보곤 했다. 굳은살이 박인 마디는 여전히 그냥 사람 손이었다. 힘을 꽉 줘 봐도 빛 같은 건 새어 나오지 않았다. 웡씨네 누나는 그냥 방에 있다가 그렇게 됐다던데, 천 번 만 번 샌드백을 친 이 손은 왜 아무것도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면 곧바로 두 블록 건너의 그 남자애가 떠올라서, 명월은 괜히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고 주먹을 풀었다.

서명하"형아. 안 자?"

아래 칸 침대에서 졸린 목소리가 올라왔다. 명월은 창틀에서 내려와 이불을 들추고 그 옆에 몸을 밀어 넣었다. 명하는 늘 그랬듯 품 안쪽으로 파고들더니, 한참 꼼지락거리다가 조그맣게 물었다.

서명하"형아도 그거 될 수 있어? 빛 나오는 거."

서명월"...아무나 되는 거 아니래."

서명하"되면 웡씨네처럼 좋은 데 가?"

서명월"글쎄. 좋은 데인지 아닌지도 모르지."

서명하"그럼 안 됐으면 좋겠다."

명월은 대꾸하지 않고 아이 머리 위에 턱을 얹었다. 명하는 그 말을 끝으로 금세 숨소리가 느려졌고, 명월은 한참 동안 눈을 뜬 채 천장에 일렁이는 빨래 그림자를 올려다봤다. 된다면 무엇이든 지킬 수 있을 것 같았고, 동시에 그게 이 좁은 방에서 제일 먼저 누군가를 다치게 할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을 바라야 하는지 명월은 끝내 정하지 못했다.

창밖 멀리, 까우룽 시티 쪽 하늘이 아주 잠깐 희끄무레하게 밝아졌다가 꺼졌다. 번개인지 누군가의 빛인지는 알 수 없었고, 그 방향에서 한참 뒤에야 낮은 폭음이 밀려와 유리창을 가늘게 떨게 했다.

개문이 있던 날로부터 꼭 1년이 되는 날이었다. 명월은 그런 날짜 같은 건 따로 세고 있지 않았는데, 배급소 줄에 서 있던 누군가가 오늘이 그날이라며 중얼거리는 바람에 알게 되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 몇이 잠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고, 아무 일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다시 제 앞사람 뒤통수로 시선을 떨궜다.

쌀 포대는 작년 이맘때보다 또 한 뼘쯤 가벼워져 있었다. 명월은 그걸 어깨에 둘러메고 늘 다니던 길 대신 삼수이포 뒤편의 오래된 주거 블록을 가로지르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건물과 건물 사이가 어른 둘이 겨우 비껴 지나갈 만큼 좁고, 머리 위로는 빨래줄과 전깃줄, 불법으로 덧댄 철제 발코니들이 뒤엉켜 하늘을 거의 가리고 있는 곳이었다. 위험하다는 건 알았지만 여기로 가로지르면 이십 분이 줄었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명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골목 중간쯤을 지날 때였다. 귓속이 갑자기 먹먹해졌다. 비행기가 내려앉을 때처럼 고막이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났고, 동시에 머리 위 빨래들이 바람 한 점 없이 일제히 한쪽으로 쏠렸다. 명월은 걸음을 멈췄다. 그 감각을 알았다. 1년 전 전동차 안에서, 불이 꺼지기 직전에 똑같이 귀가 먹먹했었다.

블록 두 개쯤 건너, 아파트 옥상 물탱크 위의 허공이 종이를 찢듯 세로로 벌어졌다. 소리는 없었다. 대신 그 틈 주변의 빛이 이상하게 휘어서, 틈 너머의 건물 외벽이 물속에서 보는 것처럼 일렁였다. 어디선가 누군가 비명을 질렀고, 그 비명이 신호라도 된 듯 골목 전체가 한꺼번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문이 쾅쾅 닫히는 소리, 계단을 굴러 내려오는 발소리, 아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들이 뒤섞였다. 한참 늦게, 동네 어딘가에 달아 둔 수동 사이렌이 목이 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명월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왔던 길로 뛰려다가 멈춰 섰다. 골목 입구 쪽 하늘에서도 똑같이 빛이 휘고 있었다. 틈이 하나가 아니었다. 앞뒤가 다 막혀 있다는 걸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사이 첫 번째 것이 떨어졌다. 옥상에서 옥상으로, 발코니 난간을 밟고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그것은 몸집이 커다란 개만 했는데, 관절이 있어야 할 자리에 관절이 없고 없어야 할 자리에 꺾임이 있었다. 뒤이어 둘, 셋이 더 흘러내렸다. 누군가의 발코니 화분이 떨어져 깨졌고, 그 소리 쪽으로 그것들이 한꺼번에 고개를 돌렸다.

명월은 쌀 포대를 끌어안고 바로 옆 건물 1층, 반쯤 내려진 채 녹슬어 멈춘 식당 셔터 밑으로 몸을 굴려 넣었다. 등이 콘크리트 바닥에 쓸리면서 따끔했다. 안은 오래전에 문을 닫은 가게였는지 기름 전 냄새와 곰팡내가 코를 찔렀고, 뒤집힌 플라스틱 의자와 깨진 그릇 조각들이 발에 걸렸다. 명월은 최대한 소리를 죽여 가며 주방 쪽 스테인리스 조리대 뒤로 기어가 몸을 붙였다. 조리대 다리 사이로 셔터 밑 틈새가 보였다. 한 뼘 높이의 바깥 세상이, 가로로 길게 잘린 필름처럼 비쳤다.

그 틈으로 발이 지나갔다. 사람 발이었다. 슬리퍼 한 짝이 벗겨진 채로 뛰어가던 그 발은 틈새 끝까지 가기 전에 갑자기 옆으로 끌려 사라졌고, 짧은 소리 하나가 났다가 끊겼다. 명월은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손바닥에 제 숨이 뜨겁게 부딪혔다.

테미스가 온다고 했다. 뉴스에서, 배급소 게시판에서, 동네 아저씨들 입에서 몇 달 내내 들은 말이었다. 균열이 열리면 검은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온다고. 하지만 그게 십 분 뒤인지 한 시간 뒤인지, 이 좁아터진 뒷골목까지 오기는 하는 건지 아무도 말해 준 적이 없었다. 두 블록 건너 그 남자애 때도 그 사람들은 한참 뒤에야 왔다고 했다.

그러니까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숨을 죽이고, 움직이지 않고, 저것들이 다른 데로 가 주기를 바라면서. 명월은 조리대에 이마를 대고 속으로 숫자를 셌다. 링 위에서 다운을 당했을 때 심판의 카운트를 들으며 숨을 고르던 것처럼, 하나, 둘, 셋. 여기서 살아 나가면 된다. 쌀을 들고 805호 문을 열면, 명하가 형아 하고 달려올 거고, 할머니는 늦었다고 잔소리를 할 거다. 그거면 됐다.

스물까지 셌을 때, 머리 위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식당 위층 어딘가였다. 천장의 석고 가루가 머리 위로 부슬부슬 떨어졌고, 뭔가가 무거운 걸 끌고 가는 듯한 소리가 천장을 따라 천천히 가로질렀다. 명월은 숫자를 놓쳤다. 다시 하나부터 셌다.

천장을 가로지르던 소리는 한참 만에 건물 뒤편 어딘가로 멀어졌다. 명월은 그제야 막고 있던 입에서 손을 조금 떼고, 목구멍에 걸려 있던 숨을 아주 천천히 흘려보냈다. 석고 가루가 속눈썹에 내려앉아 눈가가 따끔거렸는데도 비비지 않았다. 셔터 밑 한 뼘짜리 틈새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았고, 멀리서 울던 사이렌 소리마저 어느 순간 뚝 끊겨 골목 전체가 물속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그 고요가 오히려 더 무서웠다. 명월은 조리대 다리 사이로 틈새를 노려본 채 다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서른을 넘기고, 마흔을 넘기고, 쉰 가까이 갔을 때쯤 틈새 바깥의 빛이 아주 조금 어두워졌다. 무언가가 셔터 앞에 와서 멈춰 선 것이었다.

처음 보인 건 다리였다. 사람 팔뚝만 한 굵기에 회색빛이 도는, 젖은 고무 같은 표면이 틈새 앞 바닥을 짚고 있었는데, 발가락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 콘크리트 위를 더듬듯 천천히 오므렸다 펴지기를 반복했다. 킁, 킁, 하고 뭔가를 들이마시는 소리가 셔터 너머에서 났다. 냄새를 맡고 있었다. 명월은 품에 끌어안은 쌀 포대를 저도 모르게 더 세게 조였다가, 비닐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소스라쳐 그대로 굳었다.

그것은 한동안 셔터 앞을 떠나지 않았다. 다리가 틈새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느리게 옮겨 갔다가 되돌아왔고, 그때마다 셔터 철판이 무게에 눌려 끼익 하고 아주 가늘게 울었다. 명월은 눈을 감지 않으려고 애썼다. 감으면 저게 어디 있는지 모르게 될 것 같았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한 줄 흘러내려 허리춤에서 멎었다.

그러다 다리가 틈새 밖으로 빠져나갔다. 발소리가 옆 가게 쪽으로 옮겨 가는 것이 들렸고, 명월은 조리대에 이마를 붙인 채 참았던 숨을 반쯤 내쉬었다. 됐다, 지나갔다, 하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조리대 옆, 벽에 비스듬히 기대 세워져 있던 녹슨 진열대에서 뭔가가 미끄러졌다. 몸을 붙이느라 어깨가 진열대 다리를 아주 조금 밀었던 모양이었다. 맨 위 칸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쌓여 있던 양철 통조림 몇 개가 차례로 기울더니, 명월이 손을 뻗을 새도 없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텅, 텅, 하고 양철이 콘크리트를 때리는 소리가 텅 빈 식당 안에서 터무니없이 크게 울렸고, 그중 하나가 데굴데굴 굴러가 셔터 철판에 부딪혀 쨍 하고 멈췄다.

옆 가게 쪽에서 나던 발소리가 뚝 끊겼다.

명월은 숨을 쉬지 못했다. 셔터 밑 틈새의 빛이 다시 어두워지는 데는 채 두 박자도 걸리지 않았다. 이번엔 다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몸을 한껏 낮춰, 바닥에 뺨을 대다시피 하고 틈새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 뼘 높이의 가로로 긴 틈 안에 얼굴이라고 하기엔 너무 길쭉한 무언가가 가득 들어찼고, 그 한가운데에서 탁한 노란빛 눈 하나가 느리게 굴러와 초점을 맞췄다.

조리대 다리 사이, 어둠 속에 웅크린 명월의 눈과 정확히 마주쳤다.

그 눈은 깜빡이지 않았다. 동공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검은 줄 하나가 가늘게 좁아졌다가, 무언가를 확인했다는 듯 천천히 벌어졌다. 셔터 너머에서 입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젖은 것이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이빨인지 뼈인지 모를 것들이 서로 부딪치는 딸깍거림. 틈새 아래로 회색 다리 하나가 비집고 들어와 바닥의 통조림을 옆으로 밀쳐 냈고, 녹슨 셔터가 아래에서부터 들어 올려지며 비명 같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명월은 쌀 포대를 놓았다. 손이 저절로 옆으로 뻗어 바닥에 굴러다니던 부러진 대걸레 자루를 움켜쥐었으나 1년 전 터널에서 허무하게 꺾이던 우산대가 머릿속을 스쳤다. 소용없다는 걸 알았다. 이걸로는 안 된다는 걸, 이 손으로는 아무것도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는데도, 명월은 자루를 쥔 손에 뼈마디가 하얗게 드러나도록 힘을 주었다.

셔터가 무릎 높이까지 들려 올라가는 순간, 명월은 대걸레 자루를 쥔 채 몸을 뒤로 날렸다. 맞서겠다는 생각 같은 건 없었다. 주방 안쪽, 조리대 너머 벽에 기름때로 누렇게 전 뒷문이 하나 있었고, 몸은 머리보다 먼저 그쪽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깨로 문을 들이받자 녹슨 경첩이 비명을 지르며 반쯤 뜯겨 나갔고, 명월은 그 틈으로 굴러 나가 건물 뒤편의 더 좁은 통로에 떨어졌다. 쌀 포대는 식당 바닥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뒤에서 셔터가 완전히 찢겨 나가는 소리가 났다. 명월은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에어컨 실외기가 줄줄이 튀어나온 벽 사이로, 물이 고인 배수로를 밟고, 누군가 버리고 간 자전거를 뛰어넘으면서, 링 위에서 수천 번 반복했던 스텝이 제멋대로 발밑에서 튀어나왔다. 숨이 목구멍을 긁었다. 뒤를 쫓는 소리는 벽을 짚었다가 바닥을 짚었다가 다시 벽을 짚는, 네 개인지 여섯 개인지 모를 다리가 번갈아 콘크리트를 긁는 소리였고, 그 간격이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통로 끝에서 왼쪽으로 꺾었다. 그 길이 막다른 곳이라는 건 꺾고 나서야 알았다. 철제 방범창이 달린 창문들과 쓰레기 봉투 더미, 그리고 그 위로 삼 층 높이까지 치솟은 벽. 명월은 쓰레기 더미를 밟고 방범창 하나에 매달렸다. 녹이 손바닥을 파고들었고, 팔에 힘을 주어 몸을 끌어올리려는 찰나 발목이 뒤에서 무언가에 감겼다.

차갑고 축축한 감촉. 사람의 힘으로는 버틸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방범창을 쥐고 있던 손가락이 하나씩 떨어져 나갔고, 명월은 그대로 쓰레기 더미 위에 등부터 내동댕이쳐졌다. 봉투가 터지며 썩은 냄새가 확 끼쳐 왔다. 눈을 뜨자 그것이 바로 위에 있었다. 셔터 틈으로 보았던 그 길쭉한 얼굴이, 이번엔 가로로 잘린 틈새가 아니라 온전한 모양으로 명월의 얼굴 위를 덮고 있었다. 턱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많은 갈래로 벌어지는 입 안에서 딸깍거리는 것들이 줄지어 늘어섰다.

명월은 쥐고 있던 대걸레 자루를 그 입 안으로 쑤셔 넣었다. 자루는 뭔가에 걸려 잠깐 버티는 듯하더니, 1년 전의 우산대처럼 허무하게 우지끈 부러졌다. 그것은 부러진 나무 조각을 뱉어 내지도 않고 고개를 숙였다. 탁한 노란 눈이 한 뼘 앞까지 내려왔다.

그때였다.

가슴 한가운데, 명치 바로 아래쯤에서 무언가가 터졌다. 처음엔 몸에 구멍이 뚫린 줄 알았다. 그만큼 아팠으니까. 뜨거운 쇠꼬챙이를 명치에 박아 넣고 안에서 휘젓는 것 같은 통증은, 그 열기가 피를 타고 순식간에 온몸으로 번져 나갔다. 어깨로, 팔꿈치로, 손가락 마디 끝까지. 명월은 비명을 질렀다. 제 목소리가 제 귀에도 낯설게 들렸다. 핏줄이 전부 불에 달군 철사로 바뀐 것 같았고, 눈알 뒤쪽이 부풀어 오르듯 욱신거려서 시야가 하얗게 번졌다.

아니, 번진 게 아니었다. 정말로 하얗게, 아니 금빛으로 밝아지고 있었다. 쓰레기 더미 위에 떨어진 명월의 두 손에서, 굳은살 박힌 손가락 마디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형광등 같은 차가운 빛이 아니라 한여름 정오의 햇볕을 손바닥에 가둬 놓은 것 같은 빛이었다. 그 빛이 닿은 쓰레기 봉투가 지글거리며 오그라들었고, 발목에 감겨 있던 축축한 것에서 비린 연기가 피어올랐다.

위에 있던 그것이 처음으로 소리를 냈다. 딸깍거림이 아니라, 쇠를 긁는 듯한 날카로운 울음이었다. 탁한 노란 눈이 빛을 정면으로 받자 겉껍질이 녹아내리듯 허옇게 흐려졌고, 그것은 발목을 놓고 뒤로 물러나려 했다.

명월의 각성 장면 삽화

명월은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할 수가 없었다. 몸 안을 태우는 열이 어디로든 빠져나가야 했고, 몸은 가장 익숙한 방법을 골랐다. 쓰레기 더미를 짚고 튀어 오르며 오른손을 휘둘렀다. 스트레이트였다. 체육관 샌드백 앞에서 셀 수 없이 뻗었던.

금빛이 주먹 끝에서 터져 나가 골목 안을 대낮처럼 채웠고, 그것의 길쭉한 얼굴 절반이 빛 속으로 그냥 없어졌다. 녹은 게 아니라 타 버린 것도 아니라, 처음부터 거기 없었다는 듯이. 남은 몸뚱이가 벽에 부딪혀 미끄러져 내렸고, 회색 다리들이 몇 번 경련하듯 오므렸다 펴지더니 멈췄다.

명월은 그것을 내려다보며 숨을 헐떡였다. 이겼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빛이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주먹을 거뒀는데도 손에서는 빛이 계속 흘러나왔고, 오히려 점점 더 세졌다. 명치의 열이 식기는커녕 한 번 뚫린 구멍으로 끝없이 밀려 나오는 것 같았다. 명월은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늘 하던 대로, 주먹을 풀고, 아무것도 아닌 척하면 가라앉을 것 같아서. 바지 천이 닿은 자리부터 까맣게 그을렸다. 무릎이 꺾였다. 쓰레기 더미에 주저앉은 채 명월은 손에서 빛이 새어 나와 두 손이 한 덩어리의 불덩이처럼 보였다.

힘을 진정시키려는 명월의 장면 삽화

서명월"...꺼져, 꺼져, 좀 제발..."

애원하듯 흘러나온 목소리는 끝을 맺지 못하고 신음으로 뭉개졌다. 빛은 말을 듣지 않았다. 쥐고 있던 손목의 살갗이 안쪽에서부터 달아올라 붉게 부풀었고, 명치의 구멍은 숨을 쉴 때마다 조금씩 더 넓어지는 것만 같았다. 발밑의 쓰레기 봉투들이 하나둘 오그라들며 매캐한 연기를 피워 올렸고, 골목 벽에 금빛이 부딪혀 되돌아올 때마다 명월은 제 눈이 타는 것 같아 고개를 처박았다.

이러다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아주 선명하게 들었다. 저것에게 먹히는 대신, 제 손에서 나온 이것에 타서. 두 블록 건너의 그 남자애도 이랬을까 싶었고, 곧이어 805호 현관문과 명하의 졸린 목소리가 떠올라서 명월은 이를 악물었다.

그때 골목 입구 쪽에서 누군가 쓰레기 더미를 밟는 소리가 났다. 이형의 다리가 긁는 소리와는 전혀 다른, 무겁고 규칙적인 군화 소리였다. 빛 너머로 검은 제복의 윤곽이 번져 보였고,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명월의 이름도 모르는 채 그를 불렀다.

???"눈 감지 마라, 꼬마. 나 봐. 숨부터 쉬어."

군화 소리의 주인은 쓰레기 더미 두어 걸음 앞에서 멈춰 섰다. 금빛에 번진 시야로는 검은 제복과 넓은 어깨, 그리고 가슴께에 새로 박음질한 듯 빳빳한 휘장 하나 정도만 겨우 보였다. 남자는 그 빛을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눈을 가늘게 뜰 뿐 물러서지 않았다. 대신 무릎을 굽혀 명월과 눈높이를 맞추더니, 손을 뻗는 대신 귀에 꽂힌 무전기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여기 3조. 폐식당 뒤편 막다른 골목, 각성자 한 명 확보. 각성 부작용 발현 중이다. 안정반 가용 인원 있으면 바로 이쪽으로 돌려."

일 분으로 줄여. 이 애 오래 못 버틴다.

남자는 무전에서 손을 떼고 다시 명월을 봤다. 조금 전 무전기에 대고 말할 때의 날 선 목소리와는 딴판으로, 이번엔 체육관 관장님이 스파링을 끝내고 링 줄에 기대 숨을 고르라고 할 때 같은 낮고 느긋한 목소리였다.

???"잘했다. 저거 네가 잡은 거지. 처음치고 훌륭해. 그러니까 이제 그 손목 그만 쥐어짜고 날 봐. 들이마시고, 넷 셀 때까지 참았다가, 내쉬어. 할 수 있지?"

명월은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이려 했지만 목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숨을 들이마시자 명치의 구멍으로 불이 한 움큼 더 밀려 들어왔고, 넷을 세기도 전에 기침과 함께 숨이 터져 나왔다. 남자는 재촉하지 않았다. 다시, 하고 짧게 말하고는 명월이 숨을 들이켤 때 저도 같이 가슴을 부풀려 보였다. 그렇게 두 번, 세 번을 따라 하는 동안 발밑의 쓰레기 봉투는 계속 오그라들며 연기를 피워 올렸고, 남자의 제복 소매 끝에서도 천이 그을리는 냄새가 났지만 그는 끝내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그러다 골목 입구 쪽에서 또 하나의 발소리가 났다. 이번엔 가볍고 빨랐다. 같은 검은 제복을 입었지만 어딘가 몸에 덜 맞는, 명주 누나보다 몇 살 많아 보이지도 않는 여자가 숨을 몰아쉬며 쓰레기 더미를 건너뛰어 왔는데, 오는 내내 이로 장갑 끝을 물어 벗겨 내고 있었다.

안정반 대원"...이 애예요? 몇 분째예요?"

???"내가 온 뒤로만 사 분. 그 전은 모르고."

여자는 대답을 듣자마자 입술을 한 번 깨물고, 한 번도 망설이지 않은 채 맨손으로 그 빛 한가운데, 명월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지글, 하는 소리가 명월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 살이 익는 소리였다. 여자의 입가가 한순간 일그러지고 어깨가 움찔 떨렸으나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쥔 손가락에 더 힘이 들어갔고, 그 손바닥 안쪽에서 무언가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명월은 그게 뭔지 설명할 수가 없었다. 한여름 땡볕 아래 달궈진 쇠붙이에 찬물을 한 바가지 끼얹을 때처럼, 손목에서부터 칙 하고 김이 빠지는 감각이 올라왔다. 그 서늘함이 핏줄을 거슬러 팔꿈치로, 어깨로, 마침내 명치의 구멍까지 천천히 흘러 들어갔다.

안정반 대원"괜찮아, 괜찮아. 억지로 끄려고 하지 마. 밀어내면 더 튀어. 그냥 나한테 조금씩 넘긴다고 생각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건 아니었지만, 몸은 먼저 그 말을 따랐다. 명월이 쥐고 있던 제 손목을 놓자 금빛이 여자의 손 쪽으로 쏠리듯 흘러갔고, 그만큼 명치를 휘젓던 쇠꼬챙이가 한 뼘씩 뽑혀 나가는 것 같았다. 여자의 이마에 땀이 방울방울 맺혔다. 쥔 손 가장자리가 벌겋게 부풀어 오르는 게 보였는데도 여자는 이를 악문 채 숨만 고를 뿐이었고, 옆에 쪼그려 앉은 남자는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며 여자의 등 뒤에 손을 대 주고 있었다.

빛은 아주 천천히 잦아들었다. 한여름 정오 같던 금빛이 해 질 녘 창문에 비치는 노을빛만큼 흐려졌다가, 이윽고 손가락 마디 사이에서 불씨처럼 가늘게 깜빡이는 정도가 되었다. 골목이 다시 어두워지자 명월은 그제야 제 발밑이 보였다. 까맣게 그을린 쓰레기 봉투들, 그리고 벽 아래 반쯤 사라진 채 널브러진 회색 몸뚱이. 방금 제 손이 한 일이었다.

마지막 불씨가 꺼졌을 때, 여자는 쥐었던 손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손바닥 한가운데가 물집으로 뒤덮여 번들거렸다.

골목 안에 남은 건 매캐한 연기와 멀리서 다시 울기 시작한 사이렌 소리뿐이었다. 명월은 쓰레기 더미에 주저앉은 채 제 손을 내려다봤다. 조금 전까지 불덩이였던 두 손이 거짓말처럼 평범하게 돌아와 있었다. 손목 언저리만 벌겋게 달아올라 욱신거렸고, 그을린 바지 무릎에서는 아직도 가느다란 김이 올랐다.

여자는 물집 잡힌 손바닥을 허공에 조금 띄운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남자가 제 허리춤 파우치에서 붕대 뭉치를 꺼내 건네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가, 남자가 말없이 한 번 더 내밀자 그제야 못 이기는 척 받아 들고 이로 끝을 물어 손에 감기 시작했다.

안정반 대원"...아, 따가워. 이번 건 좀 세네요, 선배."

???"그러니까 하기 전에 한 번은 재 보라니까. 매번 그렇게 덥석 잡지 말고."

안정반 대원"재고 있을 시간이 어딨어요. 얘 얼굴 보셨잖아요."

남자는 대꾸 대신 짧게 코웃음을 치고 명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가까이서 보니 서른 중반쯤 돼 보이는 얼굴의 남자였다. 광대 위로 오래된 흉터가 하나 가로질러 있었고 그을린 제복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뚝이 체육관 관장님보다도 굵었다. 그는 명월 앞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다친 데가 없는지 훑어보듯 명월의 발목과 손을 차례로 눈으로 짚었다.

우천호"놀랐지. 난 우천호, 테미스 홍콩 임시 거점 현장 3조 조장이다. 너 같은 애들이 저런 것들한테 먹히기 전에 먼저 찾아내는 게 일이야. 오늘은 좀 늦었지만."

마지막 말을 할 때 그의 시선이 잠깐 골목 입구 쪽, 슬리퍼 한 짝이 끌려 사라졌던 방향으로 흘렀다가 돌아왔다. 명월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천호"그리고 네 손 붙잡아 준 이 사람은,"

임청아"임청아. 안정반이야."

붕대를 다 감은 여자가 손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웃는데도 입꼬리 한쪽이 아픈 듯 살짝 떨렸다. 명주 누나보다 기껏해야 서너 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고, 헐렁한 제복 소매를 두 번 접어 올린 자국이 선명했다.

임청아"너는? 이름 뭐야?"

서명월"...서명월이요."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명월은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나서야 겨우 덧붙였다.

서명월"저, 집에 가야 되는데요. 쌀을, 식당에 두고 와서."

천호와 청아가 동시에 서로를 봤다. 잠깐의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건 천호였다. 조금 전 숨 쉬는 법을 가르쳐 줄 때와 똑같이 서두르지 않는 목소리였다.

우천호"쌀은 내가 챙겨 주마. 집도 데려다줄 거고. 근데 명월아. 다음번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옆에 없을 수도 있어. 그 얘기는 집에 가서, 네 식구들 앞에서 제대로 하자."

명월은 제 손을 다시 내려다봤다. 굳은살 박인 마디 사이 어딘가에,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가 숨어 있는 것만 같았다.


805호 원탁은 여덟 식구가 둘러앉으면 늘 팔꿈치가 부딪칠 만큼 좁았다. 오늘은 거기에 손님 둘이 더 끼어 앉아, 명진은 이층 침대 사다리에 걸터앉았고 명아는 명주 누나 등 뒤에 반쯤 숨듯 붙어 섰다. 천장 선풍기가 여느 때처럼 삐걱거리며 돌았지만 그 소리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식당 바닥에 두고 왔던 쌀 포대는 천호의 말대로 현관 옆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포대 한쪽이 그을려 까맣게 눌어붙어 있었고, 할머니는 그 자국을 한 번 보고는 다시 보지 않았다.

어머니가 내온 보리차 잔 두 개가 손님들 앞에서 식어 가고 있었다. 청아는 붕대 감은 손을 식탁 아래로 내려 무릎 위에 올려 두었고, 명하는 그 손을 식탁 모서리 너머로 자꾸만 흘끔거렸다. 명월은 식구들과 손님 사이,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자리에 앉아 제 손을 허벅지 사이에 끼운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먼저 입을 연 건 천호였다. 그는 잔을 들지 않은 채 두 손을 식탁 위에 가지런히 얹었다.

우천호"갑자기 들이닥쳐서 죄송합니다. 놀라셨을 겁니다. 오늘 오후 이 근처 블록에 균열이 열렸고, 아드님이 그 안에 휘말렸습니다. 다친 곳은 없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아드님이 각성했습니다."

아버지가 천천히 명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 묻고 싶은 얼굴이었으나 입술만 한 번 달싹이고 말았다.

할머니가 식탁을 짚고 몸을 앞으로 당겼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떨리지는 않았다.

할머니"그래서 우리 명월이. 데려가겠다는 거 아니오. 말 돌리지 마시오."

천호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눈을 피하지도 않았다. 잠깐의 침묵이 식탁 위에 내려앉았다가, 그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그 침묵을 걷어 냈다.

우천호"숨기지 않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아드님 몸에서 나온 힘은 아드님 뜻대로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형이 쓰러진 다음에도 빛이 계속 새어 나왔고, 주변 물건들을 불태우기 시작했습니다. 저희가 조금만 늦었으면 아드님 스스로 그 열에 다쳤을 겁니다."

그는 말을 멈추고 청아 쪽을 슬쩍 봤다. 청아는 망설이다가 식탁 아래 두었던 손을 올려 보였다. 붕대 끝으로 누런 진물이 배어 나와 있었다. 명하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작게 났고, 어머니가 명하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우천호"각성자들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상부에서 아직 정확한 명칭이 정해지진 않았지만 저희는 현재 이들을 센티넬과 가이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드님은 센티넬입니다. 강력한 능력을 갖고 있지만 스스로의 불을 끌 수 없는 각성자들을... 말합니다."

우천호"한 번 열린 힘은 다시 닫히지 않습니다. 오늘은 청아 덕분에 진정됐지만 언제든 다시 폭주할 수 있습니다. 한밤중에 이 방에서, 동생들이 자는 옆에서 몸이 모든 걸 불태울 수 있단 뜻입니다. 그때 옆에 가이드가 없으면 아드님을 멈출 방법이 없습니다."

어머니의 손이 명하 어깨 위에서 굳었다. 두 블록 건너 그 남자애 얘기를 모르는 사람은 이 식탁에 아무도 없었다.

우천호"그래서 테미스는 각성자를 등록하고, 거점에서 힘을 다루는 법을 가르칩니다. 등록한 각성자의 가족에게는 우선 배급이 나가고, 원하시면 거점 안쪽 거주 구역으로 옮기실 수 있습니다. 거기는 적어도 이 동네보다는 균열 대응이 빠릅니다."

서명진"...진짜 가족 다 같이 가는 거예요?"

명진이 사다리 위에서 불쑥 물었다. 할머니가 돌아보며 눈을 흘겼지만 이번엔 손등을 때리지 않았다.

우천호"같이 갈 수는 있습니다. 같은 방에서 지내지는 못합니다. 아드님은 훈련 기간 동안 각성자 숙소에 따로 머물게 됩니다. 면회는 됩니다. 자주는 어렵습니다."

그는 좋은 말만 골라 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입을 다문 건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천호가 그제야 식은 보리차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우천호"오늘 당장 결정하시라는 말씀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강제로 데려갈 생각도 없습니다. 다만 사흘 안에는 답을 주셔야 합니다. 그동안은 제가 이 블록 근처에 사람을 하나 붙여 두겠습니다. 감시가 아니라,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달려올 수 있게 해 두려는 겁니다."

천호는 잔을 밀어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청아도 따라 일어서며 붕대 감은 손을 등 뒤로 슬쩍 감췄다. 그 짧은 동작을 명하가 끝까지 눈으로 좇았다.

우천호"명월아. 오늘 밤 손이 뜨거워지면 참지 말고 창문 열고 소리쳐. 누가 올 거다."

명월은 대답 대신 허벅지 사이에 끼운 손에 힘을 주었다. 현관문이 닫히고 계단을 내려가는 군화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원탁 앞의 누구도 입을 떼지 않았다.

침묵을 깬 건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식은 보리차 잔 두 개를 거둬 싱크대로 가져가며 등을 돌린 채 한마디만 했다.

할머니"밥이나 안치자. 쌀 가져왔잖냐."

물 트는 소리가 유난히 길게 이어졌다. 명월은 그 등이 아주 조금 떨리는 걸 보고서야 고개를 숙였다.


그날 저녁 밥상에는 흰쌀밥이 올라왔다. 그을린 포대에서 퍼낸 쌀이라 밥알 몇 개에 탄내가 배어 있었다. 아무도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어머니가 통조림 햄을 얇게 썰어 여덟 조각으로 나눴고, 할머니는 늘 그렇듯 제 몫을 명하 밥그릇 위에 슬쩍 얹었다.

숟가락이 그릇에 닿는 소리만 원탁 위를 오갔다. 명진은 평소처럼 반찬 투정을 하지 않았고, 명아는 밥알을 하나씩 세듯 천천히 씹었다. 명월은 제 앞의 밥그릇을 쥐려다 손을 멈췄다. 손바닥이 그릇에 닿으면 또 무언가 벌어질 것만 같아서, 결국 그릇을 식탁 위에 둔 채 고개를 숙여 밥을 떠 넣었다. 명주 누나가 그걸 보고 아무 말 없이 반찬 접시를 명월 쪽으로 밀어 주었다.

아버지는 식사 내내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오후에 손님들이 앉아 있던 동안에도, 그들이 돌아간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밥을 반쯤 비웠을 때, 아버지가 젓가락을 밥그릇 위에 가로로 걸쳐 놓았다. 달그락, 하는 작은 소리였다. 그 소리에 식탁 위의 숟가락질이 하나둘 멈췄다.

아버지"보내자."

짧은 한마디였다. 아버지는 누구의 얼굴도 보지 않고 제 밥그릇 가장자리만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버지"명월이. 그 사람들한테 보내자."

할머니의 숟가락이 식탁에 탁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할머니"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제 새끼를, 그것도 장남을, 어디로 끌려가는 줄도 모르고 내주겠다고?"

아버지"어머니."

할머니"어머니는 무슨 어머니야. 아까 그 사람 말 못 들었어? 같은 방에서도 못 지낸댔다. 면회도 자주는 안 된댔어. 그게 끌려가는 거지 뭐가 끌려가는 거야."

할머니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명하가 숟가락을 쥔 채 어머니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어머니는 명하의 등을 쓸어 주면서도 아무 편도 들지 않았다. 입술을 꾹 다문 얼굴이 할머니보다 오히려 더 창백했다.

아버지는 한참 동안 대꾸하지 않았다. 식탁 모서리에 올려 둔 두 손이 천천히 깍지를 꼈다가 풀렸다. 공장 기계에 끼어 휘어진 새끼손가락 마디가 형광등 아래 도드라져 보였다. 이내 아버지의 시선이 그을린 명월이 바짓자락에 닿자, 명월은 들켜서는 안될 것을 보인 것 마냥 몸을 움츠렸다

아버지"오늘 그 아가씨 손 보셨잖아요. ...명월이가 한밤중에 저 침대에서 터지면요. 명하가 저 애 품에서 잡니다. 매일 밤요. 그때 저는 또 뭘 합니까. 물이라도 끼얹습니까."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서명주"...아빠 말이 맞아요, 할머니. 저도 아까 계속 그 생각 했어요."

명주 누나가 작게 거들었다. 목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졌다. 사다리 쪽에 앉은 명진이 뭔가 말하려다 할머니 얼굴을 보고 도로 삼켰다.

아버지가 그제야 처음으로 명월을 똑바로 바라봤다. 늘 피곤에 절어 있던 눈이 오늘따라 붉었다.

아버지"명월아. 아빠가 못나서 하는 말이다. 네가 가야 식구들이 배곯지 않고, 네가 가야 너도 안 다친다."

선풍기 날개가 삐걱거리며 한 바퀴를 더 돌았다. 할머니가 제 앞의 밥그릇을 밀어 두고,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울음소리는 새어 나오지 않았다. 어깨만 아주 작게 들썩였다.

그 사이 명하가 어머니 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명월을 올려다봤다. 무엇을 물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명월은 허벅지 위에 올려 둔 제 손을 내려다봤다. 손가락 마디 사이 어딘가가, 아까보다 아주 조금 따뜻했다.


불이 꺼진 805호는 여덟 사람의 숨소리로 가득 찼다. 아버지의 코 고는 소리가 벽 쪽에서 낮게 깔렸고, 이층 침대 위칸의 명진은 몇 번 뒤척이다 조용해졌다. 창밖으로는 멀리 순찰차 불빛이 이따금 천장을 쓸고 지나갔다.

명월은 아래칸 침대 가장자리에 모로 누워, 벽에 등이 닿을 만큼 몸을 붙이고 있었다. 매일 밤 제 품으로 파고들던 자리를 비워 두려는 생각이었다. 두 손은 가슴께에 모아 이불 밖으로 내놓았다. 손끝이 조금이라도 뜨거워지면 곧장 알아챌 수 있도록.

그 비워 둔 자리에서 이불이 부스럭거렸다.

서명하"...형아. 자?"

명월은 대답하지 않았다. 명하는 형이 깨어 있다는 걸 안다는 듯 이불을 끌어당기며 한 뼘 더 다가왔다. 명월이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지만 등 뒤는 이미 벽이었다.

서명월"...오늘은 할머니 옆에서 자."

서명하"할머니 울어서 싫어."

명하가 작게 속삭였다. 명월은 할 말을 잃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할머니 쪽에서는 정말로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아주 가끔 새어 나왔다.

서명하"형아 진짜 가?"

서명월"...몰라."

서명하"아빠가 가라 했잖아."

서명월"모른다니까."

명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순찰차 불빛이 한 번 더 천장을 가로질렀다. 그 빛에 비친 명하의 얼굴이 입술을 쭉 내밀고 있었다. 무언가 참고 있을 때 짓는 얼굴이었다.

서명하"아까 그 누나 손. 형아가 그랬어?"

명월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거짓말을 할 수도 있었다. 명하는 아직 어리니까. 하지만 식탁 모서리 너머로 그 붕대를 끝까지 눈으로 좇던 얼굴이 떠올랐다.

서명월"...응. 형이 그랬어."

말을 뱉고 나서야 목이 메어 왔다. 명월은 입술을 깨물고 숨을 들이마셨다. 넷을 셀 때까지 참았다가, 내쉬었다. 골목에서 그 남자가 가르쳐 준 대로.

그 사이 명하의 작은 손이 이불 밑에서 기어 나와 명월의 손등 위에 턱 얹혔다. 명월은 숨을 멈춘 채 굳어 버렸다.

서명월"명하야, 손 치워. 뜨거우면 어떡하려고."

서명하"안 뜨거워. 따뜻해."

명하는 손을 치우기는커녕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형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 넣었다. 굳은살 박인 마디가 아이의 말랑한 손가락에 닿았다. 명월은 손을 빼려다가 끝내 그러지 못했다. 정말로 뜨겁지는 않았다. 겨울밤 이불 속에 넣어 둔 보리차 병처럼, 딱 그만큼 따뜻했다.

서명하"형아. 거기 가면 안 아파?"

서명월"...그 사람이 안 아프게 해 준대."

서명하"그럼 가."

명월은 고개를 돌려 명하를 봤다. 명하는 형의 손을 꼭 쥔 채, 울음을 삼키느라 콧잔등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서명하"그 대신 로봇. 대회 끝나면 사 준다 했잖아. 그거 아직 안 사 줬어. 그러니까 꼭 와야 돼."

대회. 명월은 그 단어를 오랜만에 들었다. 가방 속 봉투, 할머니의 부적, 현관에서 여덟 식구가 한꺼번에 떠들던 아침. 그게 고작 일 년 전 일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명월은 대답 대신 명하를 조심스럽게 끌어당겼다. 아이의 정수리가 제 턱밑에 닿았다. 매일 밤 그랬듯이. 명하는 금세 숨소리가 느려졌고, 형의 손가락을 쥔 작은 손에서도 서서히 힘이 풀려 갔다.

명월은 그날 밤 끝내 눈을 붙이지 않았다. 품 안의 체온과 제 손끝의 온기가 뒤섞이는 경계를, 동이 틀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았다.

「태양을 삼킨 늑대 (상)」 · 다음 편에 계속